전라남도 서남쪽 육지로 정으로 쪼아낸 듯 오목하게 파고 들어온 곳에 강진만이 자리 잡고 있다. 탐진강의 하구이기도 한 강진만은 아홉 고을의 물길이 모이는 곳이라해서 구강포로도 불린다.
강진 고을은 예로부터 풍광이 뛰어고 인심이 넉넉했다. 멀리 월출산을 배경으로 강진읍을 삼면으로 둘러싼 높고 낮은 산들과 바다를 끼고 강진만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구릉지대, 강진만 끝자락에 자리한 마량포구는 푸른 섬들과 갯벌로 풍요롭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도 이런 산과 들의 넉넉한 품안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마음껏 자신의 서정적 글로 풀어냈다. 역사와 문화가 오롯이 살아 숨 쉬는 고을 강진에는 전국에 답사 열풍을 몰고 왔던 유명한 천년 고찰 무위사를 비롯해 영랑생가, 다산초당, 백련사, 고려청자생산지, 전라병영성, 백운동별서정원, 석문공원. 세계모란공원, 생태공원, 가우도, 오감통, 사의재, 전통옹기마을, 마량항, 강진군 전체가 볼거리, 배울거리, 즐길거리로 가득하다.
“하늘과 바다, 산과 들을 벗 삼아 느림보 여행 즐겨요”
- 사랑⁺ 구름다리·오감통·다산초당·영랑생가-
사랑 이어주는… 석문공원 ‘사랑⁺ 구름다리’
남도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강진군 도암면 석문산 석문공원 ‘사랑⁺ 구름다리’는 지난 2016년 7월 개통했다. 국내 산악현수교로서 가장 긴 111m를 자랑한다. 다리 바로 옆에는 견우직녀봉이 있다. 언제부터인지 마을사람들 사이에 불리어 오다 다리 완공과 함께 인연을 맺었다. 강진군은 석문산과 만덕산을 잇는 코스를 전문 등산객은 물론 연인, 가족단위 등 다양한 계층이 이용할 수 있도록 등산로, 주차장, 포토존 등 관련 시설도 정비했다. 지난 여름철엔 다리 아래 계곡 물놀이장에 인파로 북적였고 가을에 접어들면서 ‘사랑⁺ 구름다리’를 건너는 관광객들이 늘고 있다. 다리에서 5분 거리인 전망대에 오르면 석문계곡과 기암괴석 그리고 멀리 도암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해안 생물다양성의 보고(寶庫)… 강진만 생태공원
강진만 생태공원은 지난 2014년 생태탐방로 사업을 시작으로 2015년 ‘남해안 하구 최대 생물다양성의 보고’라는 국립환경과학원의 발표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생태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발표 당시 확인된 강진만의 동·식물 개체종류는 무려 1천311종에 이른다. 지난 2016년 ‘제1회 강진만 춤추는 갈대축제’를 통해 첫 선을 보여 강진만 갈대숲은 ‘순천만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강진군은 갈대숲과 연접한 제방쪽 자전거도로의 컬러디자인, 앉아서 갈대숲을 감상할 수 있는 쉼터의자, 탐방로 난간 개선, 축제장에서 갈대숲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정원조성 등 생태관광지로서의 환경을 대폭 개선했다.
특히 강진읍 남포교차로에서 남포마을 입구를 통해 축제장까지 2차선 진입로를 새로 개설하고 대규모 주차장도 확충했다.
강진만 생태공원은 탐진강의 민물과 강진만의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역’으로 짱뚱어와 게, 철새는 물론 붉은발말똥게, 대추귀고둥, 큰고니 등 멸종위기종이 서식하고 있는 생태다양성의 보고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데크로 이뤄진 탐방로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생물을 직접 관찰할 수 있어 자녀들을 위한 최적의 자연생태학습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소설 ‘한강’의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일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길과 연접해 있고, 예부터 제주도를 오가던 대표 포구로도 알려져 있어 자연과 역사, 문화, 스토리가 살아 숨 쉬는 강진의 으뜸 관광명소다.
서정시인의 돌담 너머에는… 영랑생가
영랑 김윤식 선생은 1903년 1월 16일 김종호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채준이었으나 윤식으로 개명했다. 영랑은 아호다. 올해 건국포장을 받아 독립유공자로서 선생의 존재를 거듭 확인했다. 문단 활동 시는 아호인 ‘영랑’을 사용했다. 영랑선생은 1950년 9월 29일 숨을 거두기까지 주옥같은 시 80여 편을 발표했다. 그중 60여 편이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 영랑생가는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옮긴 후 몇 차례 전매됐다. 1985년 강진군이 매입해 관리해 오고 있다. 일부 변형되었던 안채는 1992년에 원형으로 보수했고 철거됐던 문간채는 영랑 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 복원했다. 생가에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샘,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남아 있고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다. 생가 안으로 들어서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은행나무가 품위를 더해주고 군청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싱싱, 탱탱, 질 좋은 회감 넘쳐나는… 마량놀토수산시장
마량놀토수산시장은 남해안 최고의 수산시장이다. 마량놀토수산시장에서 판매되는 모든 수산물은 당일 강진군수협이 위판한 것으로 일반시장보다 20~30% 저렴하다.
최고 품질, 최고 신선, 최고 저렴의 ‘3最’와 수입산과 비브리오, 바가지요금이 없는 ‘3無’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미항 마량토요음악회를 비롯해 즐길 거리와 먹을 거리로 넘쳐난다. 주말이면 강진 마량은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여기저기서 웃음가득 활기가 넘친다.
음악도시로 비상 꿈꾸는 강진… 오감통
강진읍이 대한민국 최고의 음악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은퇴가수들이 모여들면서 미국에서 손꼽히는 음악도시로 성장한 브랜슨이 모델이다. ‘오감통 중심 강진읍 노래도시 만들기’가 핵심이다. 구심점인 오감통 음악창작소는 광주 전남권 음악인들 뿐 아니라, 앨범 제작을 꿈꾸는 가수들 사이에서는 입소문이 나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지역민들이 관심과 애정도 한몫했다. 강진군은 음악창작소 콘텐츠 확보와 하드웨어 기반 조성을 위한 음악창작소 조성 지원사업 공모를 통해 문화체육부관광부로부터 국비 10억 원을 확보했다. 전국 군 단위 최초 쾌거다. 강진군은 이를 계기로 강진읍 오감통을 중심으로 볼거리와 먹거리, 살거리, 즐길 거리가 있는 곳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미래 강진을 먹여 살릴 또 하나의 동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차 향기 그윽한… 강진다원
관광객들의 예상을 깨고 눈앞에 펼쳐지는 10만여 평의 강진다원의 파노라마 풍경은 속마음까지 푸름으로 적셔 놓는다. 강진다원을 굽어보는 한폭의 산수화를 연상케하는 월출산은 산세가 뛰어나며 예로부터 산 주변의 여러 사찰을 중심으로 차나무가 재배됐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월출산에서 나오는 차가 천하에서 두 번째로 좋은 차라고 극찬했다. 월출산 기슭은 해마다 5월 초면 눈이 시리도록 푸른색으로 채색된다. 5월의 강진다원은 취미로 다도를 즐기는 이들뿐 아니라 일반 나들이객들에게도 잘 알려진 관광 명소다. 방문객들은 그윽한 차 향기에 취하며 녹찻잎을 따보는 이색체험을 할 수도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세계모란공원
강진읍내 영랑생가 뒤편 세계모란공원은 사계절 내내 모란을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명소다. 유리온실은 봄에 모란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농업기술센터의 전문기술을 통해 저온저장을 이용, 사계절 내내 모란을 볼 수 있다. 세계모란원은 프랑스, 일본, 네덜란드, 독일, 미국, 영국의 국가별 모란을 심어 세계 각국의 모란을 감상하며 영랑의 시상을 떠 울려 보기에 좋은 장소이다.
호남의 3대 정원… 백운동별서정원
조선중기 처사 이담로가 들어와 계곡 옆 바위에 ‘백운동(白雲洞)’이라 새기고 만든 원림이다.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배합된 배치와 짜임새 있는 구성을 이루며 우리 전통 원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별서(別墅)이다.
백운동이란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약사암과 백운암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건물은 다산선생이 1812년 이곳을 다녀간 뒤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제자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백운동 원림의 12승경을 노래한 시문을 남겼다. 이를 근거로 호남의 유서 깊은 전통별서의 모습을 재현하게 됐다.
백운동 계곡은 강진향토문화유산 22호로 지정돼 있으며 담양 소쇄원, 완도 보길도의 부용동과 함께 호남의 3대 정원으로 일컬으며 조선중기 선비들의 은거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백운동 별서정원을 처음 보고 그 비밀스러운 풍광에 반한 노시인 정현종은 이렇게 노래했다.
“누가 숨겨 놓았는지/백운동 별서 정원/필경 월출산이 숨겨 놓았고/오래전부터/우리 마음이 숨겨 놓았으며/하늘도 합심해서/비밀을 지키고 계시니/쉬 발설하기 어렵네/저 불멸의 숲 요정들을/여기서 만나니/숲이야 계곡이야/꿈의 도가니/내 마음 오래전부터/여기 있었네/우리 꿈 세상 이래/여기 깊어 있었네/꿈도 마음도/여기 참 많이도 붐벼/이 과잉을 어쩔 줄 모르겠네.”
월출산을 병풍삼은 천년고찰… 무위사
천년고찰 무위사는 1962년 국보 제13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이 있다. 조선 초기에 세워진 주심포 건축 중에서 가장 발달된 구조형식을 지니고 있어 조선 초기 건축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다. 극락보전 안에 그려진 아미타여래삼존벽화는 2001년 7월 국보 313호로 지정됐다. 이 벽화는 호화찬란한 고려불화의 영향과 조선초기의 새로운 수법이 표현된 걸작이다. 국내에 현존하는 조선조 아미타불도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오래됐다.
온화한 색채나 신체의 표현 등 고려시대의 특징을 갖고 있으면서 간결한 무늬나 본존불과 같은 크기의 기타 인물 표현 등 조선 초기 불화의 특징도 함께 보여준다. 극락보전 안에 들어가서 직접 볼 수 있다. 아미타여래불과 좌우에 있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의 은은한 미소를 가까이서 확인할 수 있다. 무위사는 원효가 창건하고 도선국사가 중창했다고 전한다. 선각대사 형미가 또 중창했다.
생각, 용모, 언어, 행동을 중시했던 정약용의… 다산초당과 사의재
강진만이 한눈으로 내려다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있는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열여덟해 가운데 10여 년 동안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권에 달하는 서적을 집필한 곳이다. 가히 조선조 후기 실학의 본산이라 할만하다. 다산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다.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됐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됐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 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 다산초당에서 기거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했다.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뤄졌다. 다산초당은 붕괴된 것을 1957년 복원했고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했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했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 다산이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다산선생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사의재(四宜齋)는 다산이 1801년 강진에 유배 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사의재는 이곳 주막집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은 다산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붙인 이름으로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은 생각과 용모, 언어, 행동, 이 네가지를 바로 하도록 자신을 경계했던 것이다.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할 것을 스스로 주문했다. 사의재는 창조와 희망의 공간이다. 사려 깊은 주막 할머니의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얘기에 자신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교재로 교육을 베풀고, 이곳에서 경세유표를 집필하고 서러운 백성의 삶을 표현한 ‘애절양’을 지었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조선시대 육군의 총 지휘부… 전라병영성
전라병영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 설치돼 고종 32년(1895년) 갑오경장까지 조선시대 500년 가까이 전남과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이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을 맞아 병화로 불에 탔고, 이어 1895년 갑오경장의 신제도에 의해 폐영됐다. 병영성 성곽의 총 길이는 1천60m, 높이는 3.5m, 면적은 9만3천139㎡이다. 현재 사적 397호로 지정돼 있다. 병영성 내의 당시 건물이나 유적은 소실되고 없으나 성곽은 뚜렷이 남아 있다. 역사적 의의를 고려해 복원중이다..
특히 병영성은 서양에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소개했던 하멜이 1656년 강진병영으로 유배돼 7년 동안 살면서 노역했던 곳으로서, 주변의 ‘하멜기념관’과 함께 하멜 관련 역사문화 유적지로서의 역할도 크다.
강진=곽경근 선임기자 kkkwak7@kukinews.com 사진=강진군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