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의료현장에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잇따랐다.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신문화가 도입되는가 하면, 한 신규 간호사의 죽음으로 간호계 악습인 ‘태움’ 문화가 수면 위로 오르기도 했다. 갖은 논란 속에서도 묵묵히 환자 곁을 지킨 숨은 영웅들에 박수를 보내며, 2018년을 뜨겁게 달군 의료현장의 주요 이슈를 짚어봤다.
◇ ‘존엄한 죽음’연명의료결정법, 현장선 ‘삐그덕’
말기 환자들이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한 연명의료결정법(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지난 2월 4일 시행됐다.
말기환자와 임종기 환자는 연명의료계획서 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통해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밝히도록 한 것이다.
법안을 통해 환자 스스로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 연명치료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문화를 기대했으나 아직까지 환자 스스로 결정하는 경우보다 가족의 동의를 얻어 결정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환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문화가 어색한 탓에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
또 연명치료 중단을 위해 환자 가족의 동의를 일일이 받고, 법 위반 여부를 따져봐야 하는 등 과거와 달리 의료진의 업무가 과중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환자가 미리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두었더라도 임종 상황에서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하지 않은 의료기관으로 이송될 경우 연명의료계획서를 새로 작성해야 하는 등 앞으로 적지 않은 개선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법안 시행 이후 이달 3일까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자는 8만 6691명, 연명의료계획서 누적등록자는 1만 3183명으로 집계됐다.
◇'나는 너다'故박선욱 간호사, 태움·열악한 근무환경 수면 위로
설 연휴였던 지난 2월 15일 서울아산병원에 입사한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故박선욱 간호사(27세)의 사망소식으로 의료계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족들은 ‘태움’ 문화를 사망 원인으로 지목했다. ‘중환자실에 근무하던 박 씨가 격무로 하루에 잠을 세 시간밖에 못 잤으며 사망 전날에는 근무 중 일어난 실수에 대해 손을 벌벌 떨 정도로 두려움을 호소했다’는 주장이다.
태움은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말로 선배 간호사가 후임 간호사를 혹독하게 가르친다는 뜻의 은어다.
논란이 확산되자 간호계에서는 병원 내 괴롭힘 문화, 과도한 격무, 인력부족 등 묵은 응어리가 터져 나왔다. 특히 빅5로 불리는 국내 최고 병원의 중환자실 간호사가 감내해야 했던 격무와 인력부족 문제에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간호사의 열악한 근로환경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여전히 미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7일 진행된 국회 토론회에서 발표된 신수진 이화여대 간호대 교수 연구에 따르면 신규간호사 10명 중 7명은 평소 직무 스트레스로 인해 이직을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박 간호사 사망사건을 담당한 경찰은 유족과 병원 관계자, 병원 CCTV영상 등을 수사한 결과 폭행·모욕 등 가혹 행위를 발견하지 못하고 사고 한 달 뒤인 지난 3월 내사 종결했다. 현재 박 간호사 유족은 서울아산병원을 상대로 산재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낙태 처벌부터 저출산 타격까지 '위기의 산부인과'
2018년은 산부인과에 가혹한 한 해였다. 산부인과 의료행위인 임신중절수술을 정부가 나서서 ‘비도덕’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출산 전문 대형병원인 제일병원이 무너지면서 저출산 타격을 절감했다.
지난 8월 보건복지부는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대한 처분 기준을 정비한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일부개정안’의 시행을 알렸다. 특히 낙태를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 형법상 불법 낙태를 집도한 의사에 1개월의 자격정지 처분을 내린다는 내용이 명시돼 산부인과 의사들의 분노를 샀다.
여성단체와 산부인과 의료계의 반발이 커지자 9월 복지부는 낙태죄 위헌 여부를 가리는 헌법소원 결과가 나올 때까지 유예하겠다고 밝히면서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최근 경찰이 환자의 의료기록을 활용해 낙태죄 색출 수사를 진행한 것이 알려지면서 산부인과 의료인과 여성들의 불안은 지속되고 있다.
한때 국내 최고 출산병원으로 명성을 쌓은 서울 제일병원이 경영난을 맞았다. 제일병원은 현재 입원실과 분만실을 전면 폐쇄하고, 일부 외래진료만 보고 있는 상황이다. 이 외에도 최근 산부인과 병·의원의 분만 포기 또는 폐업 사례가 줄이어 발생해 의료계에서는 분만 인프라 붕괴를 우려하고 있다.
실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국회에 제출한 ‘5년간 지역별 분만심사현황’을 보면 2013년 전국 706개소였던 분만의료기관 수는 5년 후인 2017년에는 528개소로 17.6%나 줄었다. 서울의 분만시설은 최근 5년간 21% 감소해 5곳 중 1곳이 문을 닫았고, 분만기관수가 가장 많은 경기도도 18.2% 감소했다.
◇잇따른 대리수술...수술실CCTV 해법될까
지난 9월 부산의 한 정형외과에서 의료기기업체 직원의 대리수술로 환자가 뇌사에 빠진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여러 의료기관에서 무자격자 대리수술, 유령수술, 성희롱등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면서 ‘수술실CCTV 설치’가 대안으로 부상했다.
수술실 CCTV 설치를 의무화해 수술실 내 대리수술 등 불법행위를 예방하자는 것이다. 의료불신이 심화된 결과다.
환자단체는 수술실CCTV가 수술실 불법행위를 막고, 의사와 환자 간 신뢰를 회복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면서 수술실 CCTV 법제화를 요구하고 있다. 반면, 의료계는 수술실CCTV로 인해 개인정보 유출, 의료인의 직업수행의 자유침해, 불신 심화 등을 우려하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가운데 10월 경기도는 경기도의료원 산하 안성병원에 수술실 CCTV를 설치하고 환자의 동의를 얻어 수술실 내부에서 이뤄지는 일들을 살필 수 있는 시범사업을 시작해 주목을 받았다. 이후 보건복지부는 “환자의 동의하에 촬영이 가능하도록 수술실 CCTV 자율설치를 권장해 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최근 일부 개별 의료기관에서 수술실CCTV를 설치한 사례가 하나 둘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첫 영리병원, 녹지국제병원 ‘허가’
국내 첫 영리병원이 조만간 문을 연다. 이달 5일 제주도는 영리병원인 녹지국제병원 개원을 최종 허가 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조건부 개원이다.
당초 원희룡 제주지사는 숙의형 공론조사위원회의 불허 권고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그러나 불허할 경우 대내외적인 파장을 우려해 외국인 대상 조건부 허가 방향으로 결심을 굳힌 것으로 알려진다.
노동계와 의료계는 영리병원 허가가 국내 보건의료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강하게 반발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등 노동계는 국민 서명운동과 집회 등을 열어 ‘녹지국제병원 허가 철회 투쟁을 진행 중이다.
또 제주도는 영리병원 허가를 외국인 대상 진료에 한정했다고 밝힌 것에 대해 녹지병원 측이 내국인 진료를 제한한 조건은 부당하다며 법적 대응을 검토하겠다고 나서 갈등이 커진 상황이다.
한편, 녹지그룹은 지난 2015년 12월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주 서귀포시 헬스케어타운 내 부지 2만8002㎡에 연면적 1만8253㎡(지하 1층·지상 3층) 규모의 녹지국제병원 사업계획을 승인받았다. 이후 778억원을 투입해 47병상 규모의 녹지국제병원을 준공했으며, 직원도 134명가량 채용했다. 개원 준비를 마친 지난해 8월 제주도에 개원 허가 신청을 냈지만 시민사회 등의 반발로 결정이 미뤄지다 이달 5일 최종 개설 허가로 매듭지어졌다.
전미옥 기자 romeok@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