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자동차와 카드사들 간의 수수료율 전쟁이 대형가맹점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현대·기아차에 이어 한국GM, 르노삼성 등 자동차업계는 물론 유통사, 이동통신사, 항공업계 등도 신용카드 수수료 인상폭을 낮춰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그간 환자들의 비용부담과 민원 등을 이유로 끌려 다니기만 했던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한 의료기관들도 가맹계약 해지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현대·기아차가 가맹계약 해지라는 초강수를 통해 평균 1.9%의 카드수수료율을 1.89%로 0.01% 낮췄기 때문이다.
현재 상급종합병원은 전년대비 평균 0.13%p(포인트)가 오른 2.2%를, 종합병원은 0.09%p 오른 2.24%, 요양병원은 0.08%p 오른 2.3%, 병원급 의료기관은 전년과 동일한 2.29%의 카드수수료율 인상을 통보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통보된 바와 같이 수수료율이 결정될 경우 상급종합병원은 1억5000만원 가량의 수수료를 추가로 부담해야한다. 빅5로 불리는 초대형병원의 경우 지난해에만 기관당 약 99억원의 수수료를 지불한 것으로 확인돼 수수료율이 인상될 경우 100억원을 훌쩍 넘길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의료기관의 경우 여타 민간기업과 달리 수수료율을 감당할 여력이 크지 않다는 점이다. 의료기관의 경우 의료법 등에 의해 영리목적의 행위에 제한을 받는다. 진료의 경우 영리를 추구할 수 없으며 법에서 정한 진료비를 받아야한다. 그마저도 원가에 미치지 못한다.
그나마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던 ‘비급여’ 진료비도 4대 중증질환 보장성 강화정책이 완성된데다 ‘문재인 케어’로 불리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정책이 추진되고 있어 규모가 크게 줄었다. 기댈 곳은 부대시설의 임대나 장례식장·주차장 등의 운영과 같은 소규모 사업이 대부분이다.
그 때문인지 병원들이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다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법으로 통제받으며 마음대로 가격을 정하지도 못하는 공공적 성격이 강한 의료서비스에 대한 신용카드 사용수수료를 카드사가 지나치게 높게 책정하고 환자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갑질’을 한다는 것.
최근 열린 사립대학교의료원협의회는 정기총회에서 한 병원관리자는 “의료업은 공공의료를 담당하며 환자를 치료하는, 국가 의료인을 양성하는 공공적 성격이 강한 필수공익사업”이라며 “특수가맹점 가입대상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금융당국 등 다양한 경로로 협의해 나가야한다”는 뜻을 전했고,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병원협회 또한 지난해 금융위원회가 주도하고 관계부처가 상의해 발표한 ‘밴수수료 체계개편’에 대한 반대의견을 전달하는 등 불만을 표출해왔다. 나아가 여신전문금융업법 18조에서 정한 우대수수료 적용업종을 건강보험법상 요양기관까지 확대하거나 여신전문금융업법감독규정상 적격비용 차감조정대상에 공공요금과 함께 진료비가 포함될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는 도출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병원협회 관계자는 “실태를 파악해 금융위원회와 보건복지부 등을 방문하고, 여·야 정당과도 의견을 나눴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면서 “대형병원들은 죽을 맛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가슴을 쳤다.
한 대형병원 관계자도 “자동차업계가 1.9%가 많다는데 공공적 성격을 띠는 병원 평균이 2.22%다. 막말로 빚내서 수수료 줄 판”이라며 “사실 문재인 케어로 진료량이 늘었지만 실질적인 수익은 크게 늘지 않았다. 오히려 진료량에 따른 결제건수도 늘어 수수료는 더내야한다 ”고 토로했다.
이어 “현대차는 카드사에게 가맹계약 해지라도 통보할 수 있지 병원들은 환자에게 진료비를 이 카드로는 결제할 수 없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며 “수입은 늘릴 수 없고 수수료는 늘어나는데 그렇다고 지출을 줄일 수도 없는 구조에서 답이 없다. 문제가 굉장히 심각하다”고 상황의 심각성을 거듭 강조했다.
한편, 금융위원회나 보건복지부 등 정부부처는 이 같은 문제에 대해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위의 경우 현대·기아차와 카드사들 간의 카드수수료 협상과정에서 불법적인 행위는 없었는지를 살피겠다며 카드사들의 뒤를 봐주는 듯한 모습까지 내보이고 있다.
금융위는 “대형병원과 대형마트 등의 수수료가 크게 다를 수 없다. 모든 병원이 오르는 것도 아니다. 일부는 오르고 일부는 내린다. 의료계만 볼 수도 없다.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타 업종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검토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형병원들의 행보와 정부당국의 대응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