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임신중지 헌법불합치 결정에 부쳐

[기자수첩] 임신중지 헌법불합치 결정에 부쳐

기사승인 2019-04-13 04:00:00

“임신이 누군가에게는 기쁨이겠지만, 다른 이에게는 당혹과 공포일 수 있다.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해도 뒷말하기 좋아하는 우리 사회는 혼전 임신의 책임을 항상 여성에게 돌려왔다. 예기치 않은 임신의 고통과 어려움, 그리고 ‘해결’의 주체가 여성이라는 견고한 인식의 장벽 뒤에 우리 남성들은 그동안 숨어 있었다.(후략) 사정 후 지퍼를 올리면 그것으로 섹스는 끝난 것인가. 아니다. (필자와 같은) 우리 남성들은 일단 닥치고 여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2017년 말 썼던 기자수첩 중 일부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당시 격분에 휩싸여 자판을 두드려댔던 것 같다. 그로부터 1년4개월여 후 나는 다시 임신중지(낙태) 글을 쓰고 있다.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될 것을 그리 오랜 시간을 끌었나 다소간의 허탈함이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결정 순간 우리는 모두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지만, 한편으론 ‘지금으로서는 도와드릴 수 없다’고 되돌려 보낸 여성들의 얼굴이 생각났다.”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장의 말이다. 임신중지 허용을 강하게 요구했던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그간의 소회를 밝혔다. 산부인과 의사로서 여러 산모를 만난 그였을 터다. 

그러나 불법 낙태약을 먹고 불완전유산이 된 경우, 성폭력 피해자, 건강의 이유로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 ‘딸을 지우라’는 가족의 압박으로 임신중지를 선택하려 한 어머니 등을 열거하는 그의 표정에서는 그간 산부인과 의사로서, 동시대를 사는 여성으로서 느껴야만 했던 회한이 설핏 스치는 것 같았다. 그는 말했다.  

“병원에 오는 모든 여성에게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던지 임신을 유지하던 중지하던 의료진이 도와드리겠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감격스럽다.”

많은 여성들이 이번 소식에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11일 전날까지도 숱한 여성들은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허름한 변두리 산부인과에서 낙태 수술을 받았을 것이다. ‘불법’인 임신중지 수술을 해준다며 웃돈을 요구해도 여성들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돈을 건네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게 더럽고, 냄새나는 수술방에서 그녀들의 인권은 뭉개졌다.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이 단순한 정의가 헌재 결정까지 그토록 오랜 기간 용인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먼 훗날 블랙 코미디 영화의 소재로 쓰이고도 남을 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정말로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것이 나는 믿기지 않는다.   

앞으로 입법이나 건강보험 적용 여부 등 무수히 많은 숙제가 남아있다. 임신중지에 대한 세 번째 수첩은 입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되고 난 후일 것이다. 상상만 해도 눈가가 뜨거워진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
김양균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