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엔 세월호 실종자 가족보다 경찰이 더 많았다

그곳엔 세월호 실종자 가족보다 경찰이 더 많았다

[김양균의 현장보고] 2014년 4월16일~5월3일 기록

기사승인 2019-04-16 13:43:30

2014년 4월16일부터 5월3일까지 전라남도 진도군에서의 기록을 다시 들춰본다. 시간의 순서를 따르진 않되, 팽목항과 세월호 실종자 가족이 기거하던 진도실내체육관 등 공간과 그 안의 인물들에 초점을 맞춰 기술한다._편집자 주 

◇ 2014년, 진도실내체육관

어느 샌가부터 이곳은 가족보다 군인과 경찰의 수가 더 많아졌다. 동선은 정해져 있다. 갈 수 있는 곳보다 갈 수 없는 곳이 더 많다. 더 이상 섬이 아닌 진도는 다른 의미로 봉쇄된 ‘섬’이 됐다. 

진도실내체육관 앞,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눈다. 한 남자가 묻는다. 

“거기(팽목항) 잠자리는 어때요?” 

“말도 마요. 난 이틀 만에 도망쳐 나왔어요. 자기 전에 핫팩을 열 개 비벼서 바닥에 깔아놓는 거예요. 핫팩 없으면 못 버텨요. 천막에 바람이 얼마나 들어오는지.” 

“하긴 바다 바람이 오죽 세.”

“잠수부들 고충을 몰라요. 그래도 잠수부들은 다 이해해요. 그런다니까, 빨리 (시신이) 물에서 나와라 그러면서 물속에서 오 분만, 삼분만 더 있겠다고 그래요. 조금 더 수색하면 (시신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그러다 나오면 탈진하는 거야.”

이들은 이내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체육관 앞 도로에는 경찰들이 포진해 있다. 좌우에 각각 한 명씩, 예닐곱 명이 인도에 서서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다. 도로로 나서자 위압적인 몸짓으로 한 명이 다가와 제지한다. 발길을 멈추자 상대도 멈추고 노려본다. 경계의 눈이다. 

별수 없이 돌아선다. 경찰들은 체육관 입구에도 짝을 지어 교대로 서있다. 바깥문을 열면 역시 두 명이 앉아 있다. 건물 내부에도 경찰은 곳곳에 있다. 쉴 새 없이 순찰을 다니며 실종자 가족들을 동태를 주시한다. 경계의 대상은 외부보다 내부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사복 경찰은 그보다 곱절은 많아 보인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수는 취재진이 자리한 체육관 이층에 포진해 있었다. 통제 대상은 그 공간에 있는 모두다. 

갈 수 있는 곳은 정해져 있다. 일층 남자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감시하는 눈이 번뜩인다. 정부 자료를 바탕으로 한 세월호 뉴스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더 이상 뉴스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다시 체육관 앞. 세 명의 남녀가 속삭이고 있다. 오십대 남성 한 명과 사십대 중반의 여성 둘은 이렇게 말했다. 남성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열흘 안에 다 끝낸대.” 누가 무엇을 끝낸다는 걸까.

◇ 팽목항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 방파제에는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노란 리본이 바람에 나부꼈다. 사망자 다수를 차지하는 안산단원고 피해학생들을 기리는 음식도 방파제 곳곳에 놓여 있어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구조소식을 기다리는 실종자 가족들은 시신 수습만이라도 이뤄지길 고대하고 있다. 한 유가족은 해경이 수습한 시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고, 옷과 수습된 소지품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말이 커지자, 일부 매체는 바닷물에 장기간 노출된 시신의 훼손상태가 심해 안면 인식이 어려워 정부가 취한 조치라고 보도했다.

팽목항에 설치된 가족대책본부 맞은편에는 노란색 메모지가 가득 붙은 천막이 있었다. 메모지에는 사고 발생 초반에는 구조를 염원하는 글이 주를 이뤘지만, 점차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것으로 그 내용이 바뀌고 있었다. 

희생자들에 대한 미안함과 정부의 늦장 대응을 질타하는 내용이 많았다. 외국인이 쓴 글도 있었다. 더러 실종자 가족이 쓴 메모도 있었다. ‘OO야, 엄마한테 꼭 와줄꺼지? 사랑해’ 라고 적힌 메모에는 다른 메모지가 덧대 있었다. 글을 쓴 이후 다시 적어 붙인 것 같았다. ‘OO야, 오늘은 엄마, 아빠, 형 품에 꼭 오자. 기다리고 있을게’ 등. 그 중에 한 메모가 눈에 띄었다. 단 한 줄의 글이었다. ‘바다가 너무 많은 꽃을 삼켰다.’

◇ 방파제

일몰 후 팽목항에 밀려온 것은 바람이었다. 비를 피하려 덮어놓은 비닐이 바람에 펄럭댔다. 바닷바람을 이기지 못해 찢어진 것들은 이곳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방파제 끝에 세워진 등대 앞에 경찰관 A가 추위를 잊기 위해 발을 오므렸다 펴고 있었다.

“하루를 꼬박 근무해요. 스물 네 시간 근무.” A가 퍽 친절하게 말했다. 고생한다는 말 한마디에 경계심을 풀 정도이니 그에게 주입된 긴장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했다. 그는 세월호 침몰 당시부터 현장에 투입됐다. A는 “실종자 가족들이 괜찮으면 다 괜찮다”는 알 듯 모를 듯 한 말을 건넸다. 그를 뒤로 하고 한참을 걷다 다시 돌아보니 A는 연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서운 바닷바람 때문에 해가 지고 나면 인적이 뜸해지는 이곳이지만, 이날만큼은 적잖은 인파가 자리를 지켰다. 대부분 실종자 가족이었다. 차가운 쇠 난간에 연등을 매단 이들은 그 앞에 손을 모으고 서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B씨 부부도 인파에 섞여 있었다. 한겨울 점퍼를 입은 이들은 한참을 바다만 쳐다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카메라를 든 사람들 여럿이 서성댔다. 눈물을 흘리거나 울부짖는 듯한 ‘그림이 되는’ 장면을 찍으려는 수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부는 개의치 않았다. ‘아이가 바다 속에 있다. 구조 가망성이 있을까’ 부부가 이런 상념에 잠겨 있을 동안에도 파도는 계속 방파제에 부딪쳐 하연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먼저 눈물을 보인 사람은 아내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남편은 아무 말이 없다. 흐느낌은 점점 커진다. 아내는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통곡을 했다. 이 모습을 담기 위한 카메라 플래시가 한번, 두 번 터졌다. 남편은 아내의 어깨를 토닥였다. 사내는  부서질 듯 주먹을 쥐고 있었다. 

아내가 남편의 손에 입김을 불며 쓰다듬었다. 그제야 주먹이 펴졌다. 남자는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내가 말했다. “가요. 이제 가.” 부부는 한발자국씩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 다시 팽목항

그녀는 상복 대신 하늘색 코트를 입었다. 코트는 바닷빛을 닮아 있었다. 바닷바람이 머리를 흐뜨려뜨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무리 바닷물을 들여다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그녀는 손녀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리고 손녀는 바다 속에 있었다.

맹골수도의 바다는 거칠기로 악명이 높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는 버텨낼 것이다. 노파가 선 곳 옆에 간식거리가 가득하다. 배고픈 아이를 위한 제사상이다. 그 옆에 승려가 목탁을 들고 불공을 준비한다. 할머니는 두 손을 모아 힘껏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바람을 뚫고, 바다를 지나 이 목소리가 전해질까. 손녀의 이름을 부르는 노파의 목소리가 잦아지고 흐느낌이 커졌다.  배가 침몰한지 수일 후 잔인한 시간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팽목항에는 수십 개의 천막이 있었다. 사람이 붐비는 곳은 정해져 있다. 종교 단체 등이 만들어놓은 임시 식당이었다. 메뉴는 대부분 간단히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것들이다. 이날은 육개장 냄새가 났다. 자원봉사자가 일회용 용기에 밥을 담으면, 다른 이가 그 위에 국을 붓는다. 

중심이 맞지 않는 탁자가 삐거덕 댔지만, 신경 쓰는 이들은 거의 없다. 옆자리의 사내가 기자에게 음식을 권했다. 옆 천막에서 얻어왔다고 했다. 은색 식판위에 식은 파전 몇 조각이 놓여 있다. 천막 구석에 모자를 눌러쓴 사내가 아까부터 국그릇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몇 숟갈이나 뜨고는 자리를 떴다. 

전날보다 바람이 세졌다. 라이터의 불은 금세 꺼지곤 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담배에 불을 붙인 사내가 연기를 후하고 내뿜었다. 남자는 바다를 바라보고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운동화  뒤축이 그새 닳아있었다. 삐죽하게 솟은 수염, 피부도 거칠었다. 담배를 든 손마디에는 굳은살이 배여 있다. 또 걷기 시작했다. 그는 방파제 끝까지 가서야 걸음을 멈췄다. 경찰은 멀찍이 떨어져 그를 지켜봤다. 혹시 모를 불상사 때문이다. 앞서도 누군가 한명이 바다에 뛰어드는 일이 있었다.

◇ 팽목항 가족대책본부

옆 천막에서 예배가 한창이다. 찬송가를 부르다 이내 기도소리로, 다시 울부짖음으로 바뀌길 반복했다. 두 손을 모은 한 아버지의 흐느낌이 켜졌다. 그의 눈에서 흐르는 것이 있었다. 향내도 났다. 방파제에서 승려 둘이 목탁을 두드린다. 중년 여성 둘이 곁을 지킨다. 두 손은 가슴팍에 모으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린다고 아들이 빨리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모 마음이 그게 아니잖아예.” 가족대책본부에 삼삼오오 모인 가족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결론 없는 대화였다. 아버지는 담뱃불을 붙이고, 어머니는 쪼그려 앉아 바다를 쳐자봤다. 세월호가 침몰한지 십여 일이 지나고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진도실내체육관에서, 지금은 팽목항에서 지낸다. 이곳은 아직 겨울이다. 가스난로가 피워졌고, 대부분 겨울 옷 차림이었다. 인근의 이동식 전광판이 비추는 뉴스 속 잘 차려입은 앵커가 다부지게 말했다. “지금 팽목항은 하나의 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하늘이 온통 시꺼멓다. 다음날 아침부터 비가 오고 날도 궂어진다고 한다. ‘구조에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말이 뉴스마다 나온다. 아직은 파도도 잠잠하고 바람도 세지 않았다. 뉴스만 보면 꼭 태풍이 몰려올 것만 같은데.

세월호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취재진들도 눈에 띄게 줄었다. 최소 인력만 남고 철수 준비를 한다. ‘수고했다’는 인사가 오간다. 그 모습을 보던 아버지 한 명이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 노란버스

“죽겠네요잉.”

팽목항에서 진도실내체육관으로 가는 버스 안. 운전기사가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버스 운행 시간은 새벽 4시부터 밤까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남자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버스 간격은 20분. 힘들지 않느냐는 우문에 남자가 대답했다. “부모 마음만 하겄소.”

9시30분이 체육관행 마지막 버스다. 봄 소풍에 어울릴법한 노오란 버스가 사람들을 실어나른다. 이날 어두운 버스 안에는 열 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침묵 깬 것은 기자의 앞자리에 앉은 두 여인이었다. 

“어제 (새벽) 2시 반에 잤어.”

“영양제라도 좀 맞고 자지 그랬어.”

“오늘은 맞을까봐.”

침묵.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샴프있니?”

“칫솔 어디다 뒀지?”

수일 사이 체육관은 한산해졌다. 실종자 가족들 대부분은 팽목항의 천막에서 지냈다. 체육관에는 남은 가족과 친척들이 기거했다. 여인들의 대화는 이내 집 이야기로 이어졌다. 대화의 주제가 자연스레 자녀에게로 이어지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다문다. 여인 한 명이 읊조렸다. “이 자식, 언제 나오려고….” 그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 서울 청계광장

고(故) 이보미 학생이 부른 ‘거위의 꿈’이 10일 서울 중구 광화문 청계광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으로 전해졌다. 이날 광장에 모인 2000여명의 시민들은 잠시 말을 잊었다. 누군가 기자에게 말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 남의 일 같지 않았어요. 그냥 잊고 지내다가도 뉴스를 접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되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저런 일을 당하게 된다면 어떤 심정일까. 이런 일이 왜 생겼을까. 앞으로도 충분히 생길 수 있는 뭔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라고요.” 

또 다른 이도 말했다. “우리사회 구석구석에 도사린 문제들이 독버섯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이번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게 아닐까요. 세월호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그런 것들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보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죄책감이 느껴진다’는 누군가의 말. 피해자를 향한 비난과 조롱은 현재진행형이다. 기자는 우리 사회가 자식을 잃은 가족의 아픔에 공감하는 법조차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두렵다는 누군가 읊조림이 떠올랐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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