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년...같아 보여도 같지 않은 제주도 숲길

제주도에서 1년...같아 보여도 같지 않은 제주도 숲길

58년 개띠 퇴직자의 제주도 1년 살기_다섯 번째

기사승인 2019-08-17 00:00:00
제주에서 올레길을 빼고는 걷기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걷기 위해 제주에 와 한 달째가 지나가지만 나는 아직 올레길 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한 여름 뙤약볕을 이기며 한 번에 20여 킬로미터를 걸어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함덕에서 조천까지 해안길을 걸은 후 발걸음을 중산간 지대의 휴양림으로 돌렸다. 더위와 습기 때문에 숲길 걷기도 그리 쉽지는 않지만 그늘이 있어서 잠시 쉬기에 불편함이 없을 뿐 아니라 체력에 맞추어 쉬엄쉬엄 걸어도 대개는 4시간 이내에 숲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 내 자연휴양림의 길들은 잘 정비되어 있어서 낯선 방문자도 편하고 안전하게 걸으며 숲을 즐길 수 있으니 체력이 충분하지 않으면서도 걷기를 원하는 이들에겐 제격이다.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채 의욕이 앞서면 마음에 상처가 생긴다. 다 내려놓고 주저앉아 어디서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 다 내려놓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1987년 가을 취업시장에서 30살의 늦깎이 대학졸업 예정자는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다. 1983년부터 이른 바 졸업정원제를 실시한다며 입학정원을 20%나 늘려 놓고는 이 제도가 흐지부지 되면서 졸업생이 넘쳐났다. 경기가 초호황 국면에 접어들며 일자리가 넘쳐도 내게는 넘쳐오지 않았다.  

겉으론 태연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발을 동동 구르며 여름 방학 내내 취업을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마지막 학기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영어로 발행되는 잡지사에 입사가 결정되었다. 즉시 근무를 시작하는 조건이었다. 

재학시절 4년 내내 영어 공부를 하며 말하기와 쓰기 읽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 덕에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아직 재학생 신분이었고 정식 직원도 아닌 수습 직원이었지만 기존의 기자들과 비교해도 뛰어난 성과를 냈다. 5개월 후 졸업과 동시에 정식 직원으로 발령받을 때는 함께 입사한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많은 급여를 받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급여수준은 매우 낮아서 당시의 대기업 신입사원 보수와 비교해 보니 절반 정도의 수준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무엇인가 변화된 인생을 설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시작이 좋았으니 노력하면 새로운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가질 수 있었다.  

입사 후 1년 6개월쯤 되었을 때 다른 잡지 발행사에서 두 배의 보수를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받았다. 대기업의 평균 보수 수준으로 보아도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직장을 옮겼다. 세 번째 직장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도록 미친 듯이 일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정상적인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다른 58년 개띠 생들과 비슷한 수준의  보수는 받고 싶었다.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퇴근 시간이 되어도 마무리 되지 못한 일이 있으니 밤이 늦어서야 어쩔 수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매일 아침 오늘 마무리해야 할 일, 내일 예정되어 있는 일 그리고 그 다음날의 일, 일주일 후의 일을 확인하지만 내일 해야 할 일의 목록은 늘 늘어나기만 했다. 즐겁게 시작한 새 직장에서의 일이 고된 노동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 함께 점심을 먹고 헤어지며 말했다. 몇 달 새 성격이 많이 급해졌다고. 이즈음 몸에 이상 신호가 찾아오고 있었는데도 나는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세 번째 직장은 1년 만에 아무런 대책 없이 무작정 그만 두어야 했다. 과욕이 화를 불렀다.

제주에서 1년 여행을 시작하면서는 절대로 앞서가는 의욕을 따르지 않겠다고 했다. 욕심내지 않고 좋은 풍경 보며 천천히 걷기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가끔 흉흉한 뉴스가 들려오니 기왕이면 안전한 길이어야 했다. 해변 길은 걷기 좋은 길이기는 하지만 한 여름 땡볕 피할 곳 마땅치 않으니 7월과 8월엔 자연휴양림 안의 탐방로를 찾아다닌다. 

함덕에서 차로 이십분 이내의 중산간 지역엔 좋은 숲길이 여럿 마련되어 있다. 절물자연휴양림, 한라생태숲, 교래자연휴양림, 사려니숲길, 삼다수옛길 그리고 동백동산 산책로까지 모두 근처에 모여 있다. 더위 피하고 비바람 피하며 쉬엄쉬엄 함덕해변을 산책하다가 8월 첫 주에 교래자연휴양림을 걸었다. 절물자연휴양림은 인공조림지인 삼나무 숲이 울창하고 동백동산은 다듬어지지 않은 숲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나무들의 모습이 압도적이다. 

교래자연휴양림의 숲 역시 용암 돌무더기 위에 형성된 나무와 덩굴의 곶자왈이다. 숲이 울창해 숲길은 컴컴하지만 그늘을 만드는 나무들의 햇빛 경쟁은 그리 치열해보이지 않는다. 이미 곳곳에서 경쟁이 끝나 커다란 나무들이 충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크지 않은 빈 공간을 두고 작은 나무들이 다투고 있다. 숲속의 습도 역시 절물자연휴양림이나 동백동산보다는 높지 않아 걷기에 훨씬 편했다. 교래자연휴양림 내의 숲길은 경사가 가파르지 않고 어느 정도 정비되어 있어 걷기에 큰 부담은 없지만 돌투성이 길이 계속되기 때문에 긴장하고 걸어야 한다. 

교래자연휴양림은 2곳의 오름을 포함하고 있는데 입구의 늪서리오름은 야영장과 산책길로 이용되고 있다. 조금 멀리 떨어진 큰지그리오름까지는 산책로가 정비되어 있다. 마치 은밀한 비밀의 정원으로 향하는 느낌의 교래자연휴양림 입구를 들어가면 초가지붕을 인 제주 전통가옥 형태의 관리사무소가 색다르다. 산책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40분 정도 소요되는 생태관찰로를 가볍게 걸을 수도 있고 왕복 7 킬로미터의 오름산책로를 걸어 큰지그리오름 정상의 전망대에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볼 수도 있다.

숲길로 들어서니 요란한 매미 울음소리가 모든 소리를 삼키고 있다. 새소리가 인상적이었던 절물자연휴양림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이곳에 새가 없기 때문은 아니다. 8월에 접어들면서 오랫동안 땅속 생활을 하던 매미들이 한꺼번에 숲을 덮친 듯하다. 도심에서 요란한 매미소리에 새벽잠을 설친 기억이 있는 이들에게는 8월의 제주 휴양림 걷기가 썩 기분 좋은 경험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두리번거리며 숲길을 걷는데 꽃향기가 스친다. 근처 어딘가에 틀림없이 누리장나무꽃이 활짝 피어 있을 것이다. 산책로 입구 관리사무소 옆에서 본 꽃이다. 잠시 서서 돌아보는데 꽃향이 다시 보답한다. 누리장나무가 그리 자주 보이는 나무는 아닌데도 교래자연휴양림의 숲에서는 잊지 않을 만큼의 시간을 두고 꽃향이 찾아왔다.

가끔 길 옆으로 ‘숯가마터’ 또는 ‘움막터’라는 안내표지가 서 있지만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데다가 온통 풀과 나무와 덩굴로 덮여 있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가만히 서서 자세히 보아야 돌로 쌓은 담장이 풀잎 사이로 겨우 보인다. 한 때는 사람들이 머물렀던 흔적이지만 이젠 그냥 돌무더기로 돌아가고 있다. 자연의 복원력은 느리지만 위대하다. 전북 고창의 람사르습지인 운곡습지에 가면 사람이 떠난 논과 밭 그리고 마을이 어떻게 자연으로 돌아가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7월과 8월의 제주 숲길은 온통 초록뿐이다. 노랑과 분홍색 혹은 흰 꽃이 드문드문 보인다면 훨씬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아쉽게도 눈에 보이는 꽃은 거의 없고 온통 발에 밟히는 돌이 전하는 불편감에 마음이 쓰인다. 그래도 길 가장자리를 살피며 혹시 그동안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문득 어두운 그늘 속에서 1센티미터 남짓한 크기의 흰 꽃송이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들고 있던 카메라로 밝게 찍어 확대해 보니 틀림없이 야생란의 한 종류였다. 이제껏 책에서도, 실제로도 본 적이 없는 꽃이다. 휴대전화로 검색해 보니 ‘붉은사철란’이다. 다른 꽃들까지 촬영해 확대했다. 꽃잎 끝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붉은 물이 들었다. 

몇 년 전 비자림을 걷다가 산책로 옆 풀 사이에서 마치 아래 단이 넓은 치마를 입고 나풀나풀 춤을 추는 모양의 새우란꽃을 보았을 때, 또,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치악산 정상 길옆에서 감자란꽃을 보았을 때도 지금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즐거워했다.

‘붉은사철란’ 꽃 위에 엎드리다시피 해 사진을 촬영하고 있는데 마주오던 아주머니들이 멈추어 서서는 나를 살핀다. 낙엽 위에 피어 있는 ‘숲속의 요정’을 보고는 저마다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사진을 찍는다. 잠시 숲이 왁자지껄해졌다. 그들도 처음 본 꽃이었다. 나도 그들도 운수 좋은 날이었다.

마음이 들떠 설렁설렁 보며 숲길을 걸었다. 그런 눈에도 길 위에 엎드린 딱정벌레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또 사진을 찍었지만 이 벌레 이름을 알아볼 방법은 막막했다. 그런데 며칠 뒤 제주시내의 자연사박물관에 갔다가 우연히 이 벌레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제주홍단딱정벌레가 엊그제 본 그 벌레의 이름이었다.

1843년 영국인 의사 아담스 (A Adams)가 우리나라를 탐사하던 중 제주에서 이 딱정벌레를 채집해 본국의 곤충학자인 타튬 (Tatum)에게 보냈다. 타튬은 이 벌레를 [Carabus smaragdinus monilifer Tatum]이라는 학명으로 전문 학술지에 발표했다. 이렇게 제주홍단딱정벌레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린네에 의한 근대식학명으로 발표된 곤충이 되었다.

붉은사철란도 제주홍단딱정벌레도 내가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 해서 그것이 내 삶을 바꿀 만큼의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다만 교래자연휴양림의 숲길 위에서 이 꽃과 벌레가 내게 나타나 잠시 큰 즐거움을 얻었으니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언젠가 이맘때쯤 다시 제주 숲길에 들면 또 마주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걷게 될 것이다. 치악산을 오를 때마다 감자란을 생각하고 비자림을 갈 때마다 새우란을 생각하듯이.

기고 오근식 1958 년에 출생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청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강원도 인제에서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직해 근무하던 중 27살에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두 곳의 영어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인제대학교 백병원 비서실장과 홍보실장, 건국대학교병원 홍보팀장을 지내고 2019년 2월 정년퇴직했다.


편집=이미애 truealdo@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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