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의 현장을 되돌아본다. “왜성(倭城)” 3편

아픈 역사의 현장을 되돌아본다. “왜성(倭城)” 3편

기사승인 2019-08-29 18:10:49

전범국 일본은 아직도 자국의 청소년들에게 일본은 아시아 근대화에 앞장섰고 히로시마 피폭으로 많은 국민들이 희생당한 피해국가 가르치고 있다. 일본이 얼마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지 이웃나라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었는지 이 땅에 남아있는 증거물은 얼마든지 있다. 침략자가 할퀴고 간 상처가 4백년이 지난 지금도 쓰라리지만 역사적 교훈의 산물로 왜성을 잘 보존해야 하는 이유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로마서 15:4)

쿠키뉴스는 일본 아베정권의 경제침략과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시점에서 일본 침탈의 뼈아픈 역사 현장을 돌아보았다지난 3,1절 연재한 다크투어(dark tour) 시리즈 적산가옥이어 43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에게 7년 전쟁의 고통을 안겨준 임진왜란 당시 축조한 한국 내 일본성인 왜성(倭城)4회에 걸쳐 소개한다. 829일 오늘은 109년 전 우리 민족의 아픔이 서려있는 한일병탄조약이 공포된 국치일이기도하다.

1. 일본성의 원조 왜성이란

2. 왜성의 원형이 잘 보존된 서생포 왜성과 울산 왜성

3. 정유재란 최대의 격전지 순천왜성

4. 눈뜨고도 코 베인 사천왜성 외 남해안 주요 왜성

3.정유재란 최대의 격전지 순천왜성

-호남지역 유일의 왜성-

-이순신 장군 최후의 승전지-

-민초들의 고난, 헤아릴 수 없어-

-430년 지나 상전벽해(桑田碧海) 실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산업단지로 변한 왜성 앞 풍경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 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김훈 칼의 노래에서-

뭉게구름이 파란하늘을 유영하던 지난 16, 쿠키뉴스 취재팀은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위치한 순천왜성(順天倭城전라남도의 기념물 제171)을 찾았다. 외성 안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성의 일차 방어선인 해자(垓字/垓子)를 지나 제 1관문인 문지(門地)와 왜성의 특징인 복잡한 구조의 성벽을 따라 마침내 순천왜성의 지휘본부가 위치했던 천수기단에 올랐다. 광양만 너머 멀리 왜군을 섬멸한 영웅 이순신 장군의 탄신년인 1545년을 기리기 위해 1,545m로 설계된 국내최장의 이순신대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숨을 돌리고 성 아래를 내려다보니 왜군들이 수백척의 배를 정박시켰다는 선입지(선착장)은 온데간데 없고 왕복 6차선 포장도로 너머 공장과 크레인들만이 줄지어서있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니라 푸른바다가 메어진 넓은 들판에 현대제철을 비롯한 율촌산업단지가 자리잡고 있었다광양만은 여기저기 간척사업으로 메워져 순천왜성 지키는 왜 수군의 전초기지였던 장도(獐島:노루섬역시 육지 속 나지막한 야산으로 변해 있었다장도는 1597년 920순천왜성 전투가 시작되자 조명연합군 수군이 장도를 기습 공격해 군량과 마필을 탈취하고 조선인 포로 300여명을 구출한 역사적 장소이다.

430여 년 전인 정유재란 막바지인 159811, 순천왜성으로 조명연합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위기를 느낀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118(음력) , 왜군 지원병과 조명연합군이 노량해협에서 전투를 벌이는 사이 성 아래 선착장에서 야반도주해 남해 섬을 멀리 돌아 겨우 목숨을 건졌다.

순천왜성은 원활한 보급로확보와 공격과 퇴각을 쉽게 하기위해 성안으로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다리를 놓아 예교성(曳橋城) 혹은 왜교성(倭橋城)이라 불렸다. 옛 성 아래에서 적장이 황급히 배에 오르는 모습이 400년을 거슬러 머릿속에 그려졌다.

순천왜성 축성과 민초들의 고초

2차 임진왜란인 정유재란을 일으킨 왜군은 15977월부터 전라도 일대를 휩쓸고 북상했으나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전주에서 주춤한다. 왜장들은 8월 말 전주에 모여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부대만 북상하고 나머지는 남쪽으로 회군을 결정한다. 전라남도 순천으로 남하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15979월 초부터 12월 초까지 3개월간 순천왜성을 쌓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주둔했다.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전라도 지역의 유일한 왜성이다.

순천왜성의 성곽은 본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성에는 별도의 내성이 있다. 내성과 본성의 성벽은 각각 2겹으로 축조했다. 평산성으로 외곽에 제1외성이 있고 그 뒤로 해자, 2외성, 3외성을 만들었다. 또한 제3외성에는 배가 들어오는 선입지가 있었다. 성의 전체 규모는 37천여 평으로 외성길이는 2,502m 내성 1,342m 성문이 12개로 기록되어 있다. 성안에는 대략 15천명의 왜병이 주둔해 있었다.

성곽 내에는 천수기단, 문지, 해자 등의 주요 건물지가 남아 있어 성곽축조 당시의 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다이처럼 방대한 구조물이 다 자연석과 흙을 퍼 나르고 나무를 옮겨 지었다. 돌 다루는 기계나 장비가 특별히 없었을 시기에 그것도 3개월 만에 성을 쌓았으니 우리 백성들의 노역의 고통이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조선 백성의 30%가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전쟁 기간 마음껏 조선 땅을 유린했던 왜군은 동남해안 일대에 32개의 왜성을 쌓았다. 아직도 왜성의 흔적은 서생포왜성, 울산왜성, 순천왜성, 사천왜성, 웅천왜성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전투를 위해 쌓은 왜성은 규모가 크고 견고했다. 조선의 읍성처럼 평지성이 아니고 복잡한 구조여서 축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왜성을 축조하는데 왜군 병력과 수많은 조선의 민초들이 강제동원 되었다.

불교신자인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따라 다닌 종군의승(從軍醫僧) 게이넨(慶念)의 일기를 보면 왜성 축성 과정에서 조선 양민들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그 비참함이 잘 기록되어 있다. “조선인들은 새벽안개를 헤치고 산에 올라가 하루 종일 큰 나무를 베고 밤하늘 별이 빛날 때 겨우 집으로 돌려보냈다. 어느 때는 밤을 새워 돌을 쌓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괴롭고 싫은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도 죄라고 몰아붙여 심하게 질책했다. 목을 쇠사슬로 묶고, 때리고, 달군 쇠로 몸을 지져댔다. 보기에 곤혹스러울 정도였다. 도망가다가 걸리면 참수되는 것은 기본이라고 표현했다”.(朝鮮日日記: 1597111116) 일제강점기 강제노역을 다룬 영화 군함도가 오버랩 되는 순간이다.

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조선으로 왔다. 그중에 사람을 사고파는 자도 있었다. 본진의 뒤를 따라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들였다. 새끼로 목을 묶은 후 여럿을 줄줄이 옭아매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지옥의 아방(阿房)이라는 사자가 죄인을 잡아들여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朝鮮日日記: 15971119)”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천득염(66) 전남대건축과 석좌교수는 우리의 아픈 역사 유적인 순천왜성이 몇십 년전 처음 복원을 시작하면서 제대로 고증을 거치지 않고 쌓아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다. 이후에는 전문가들이 일본에 건너가 설계나 수축방법 등을 연구하고 돌아와 일본 기술자들과 함께 쌓았다.”면서 정확하지 않은 복원보다는 더 이상 훼손이 안 되게 있는 상태를 잘 보존하는게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순천왜성 전투(예교해전)와 이순신 장군

육지에서와 달리 바다를 완전히 장악한 이순신 장군은 바다 곳곳에서 왜군을 섬멸하고 있었다. 정유재란의 막바지인 15989월부터 두 달간 전개된 예교성 전투는 한, , 일 동북아 3국이 맞붙은 유일한 해상 전투였다1598818, 도요토미 히데요시가(豐臣秀吉)가 죽고 전세가 불리하자 왜군은 철수를 서두른다. 울산성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도 울산왜성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미 본국으로 철수했다는 소식을 접한 순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도 본국으로 철수를 준비한다.

하지만 육지에서와는 달리 바다를 완전히 장악한 이순신 장군은 바다 곳곳에서 왜군을 섬멸하고 있었다. 정유재란의 막바지인 15989월부터 두 달간 전개된 순천왜성 앞바다에서 벌어진 예교해전은 한, , 일 동북아 3국이 맞붙은 유일한 육, 해상 전투다.

159811, 순천왜성을 지키고 있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장수 유정과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간청했다. 진린 장군은 예교성 공격에 전력을 다하고 왜 수군과의 전투에서도 용맹하게 싸웠지만 고니시의 부탁대로 왜 통신선 한척을 빠져 나가게 해주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구조요청을 받은 시마쓰(島津義弘)등 사천, 고성, 남해에 주둔하고 있던 왜장들은 순천왜성의 고니시 부대 구출에 나섰다. 이들은 500여척의 전선에 나눠 타고 순천 왜성으로 향했다. 조명연합 수군을 지휘하던 이순신과 진린은 무수한 적들이 순천왜성 앞바다로 진격해온다는 첩보를 듣고 470척의 전선을 이끌고 1118(음력) , 물목이 좁은 노량 앞바다에 조용히 진을 쳤다.

이순신 장군은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라고 하늘에 빌고 전투에 나섰다. 칠흑 같은 밤의 정적을 뚫고 이른 새벽부터 불붙은 전투는 동트는 아침 노량 관음포의 푸른 바다를 온통 붉은 핏빛으로 물들였다. 왜선 2백 여척이 침몰하고 150여척이 분파되는 등 조명 연합수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노량해전은 순천왜성에서 920일부터 103일까지 6차례 이어졌던 예교해전의 마무리였다그렇지만 관음포(觀音浦)로 도주하는 왜선을 추격하던 이순신 장군이 왜병이 쏜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순신 장군은 최후의 순간까지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며 조선수군의 승리를 독려했다.

이순신 장군이 15981117일에 쓴 난중일기의 마지막 줄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이었다.” 당시 조명연합군의 일원으로 작전통제권을 명에 넘겨준 상황에서 가슴 아픈 기록이다.

일본이 백색국가 제외를 끝내 시행하고 한국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종료 하는 등 자국의 이익을 위한 한중의 힘겨루기는 오늘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난 역사에서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한 것이다고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힘이 없어서 당했지만 힘을 키워서 되갚았던 예교성 전투처럼 역사의 상흔이자 역사 교훈 유적인 왜성의 가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순천=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사진=곽경근 대기자 왕고섶 사진가 ‧ 순천시청 제공


곽경근 기자
kkkwak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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