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형마트에서 일하고 있는 정연숙(52·가명)씨는 지난 추석을 떠올리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산더미처럼 쌓인 박스들을 옮기고 나르며 온종일 사투를 벌였던 것. 파스가 없으면 서 있기도 힘들었다. 자세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 목·허리를 구부리거나 트는 작업이 이어졌다. 정씨는 “박스에 손잡이라도 있었다면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마트 노동자들이 무거운 박스에 손잡이 설치를 요구하고 있다. 잦은 중량 작업 노출로 이들의 무려 70%가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것. 이들은 박스에 ‘손잡이 구멍’을 내줄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박스에 양손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만 있어도 무게 부담이 감소해, 마트 노동자들의 근로환경이 크게 개선될 수 있다는 호소다.
마트산업노동조합(이하 마트노조)이 지난 6월, 마트 노동자 517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40~50대 여성이 대다수인 마트 노동자들은 평균 10kg, 최대 25kg 가량의 중량물을 하루 평균 345번 옮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근골격계 질환 증상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던 노동자들은 69.3%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665조에 의하면, 5kg 이상의 중량물을 들어 올리는 작업을 하는 경우, 취급하기 곤란한 물품은 손잡이를 붙이거나 갈고리·진공빨판 등 적절한 보조도구를 활용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마트노조 측은 “박스에 제대로 된 손잡이만 있어도 자세에 따라 10~39.7%의 ‘들기지수’ 경감효과를 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정준모 마트노조 교선국장은 “산업안전보건기준에 따른 규칙 663조에는 사업주가 중량물 작업 시 과도한 무게로 인하여 근골격계에 무리한 부담을 주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여 한다고 적혀있다”면서 “박스에 구멍을 뚫는 방법이 여러 상황과 비용을 고려했을 때, 가장 합리적인 제안으로 생각한다”라고 강조했다.
앞서 마트노조는 지난 10일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마트 노동자의 근골격계 질환 실태 및 작업환경에 대한 점검과 박스 손잡이 설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아울러 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추석명절기간에는 '마트노동자 골병든다! 추석선물로 박스에 손잡이를!' 인증사진 릴레이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다만 마트노조의 주장처럼 다수의 중량 박스에 ‘손잡이 구멍’ 설치가 실현되려면, 향후 노사정이 모여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박스 포장은 대형마트가 아니라 물건을 납품하는 제조사가 하고 있는 만큼, 여러 문제가 얽혀있는 탓이다.
한 대형마트 업계 관계자는 “마트가 손잡이 구멍 설치 등을 제조사에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라면서 “업체 입장에서는 이 같은 조치를 공정거래법을 위반하는 ‘갑질’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지가 있다”라고 우려했다. 이어 “이외에 마트 내에서 실현할 수 있는 개선 방안들은 노동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충분히 검토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제조사에서도 공정을 추가해야 하는 만큼, 이는 반기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마트노조 측은 “구멍이 있는 박스와 없는 박스 간의 제작비 차이도 크지 않다”며 관련 논의가 이제라도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직까진 음료수·주류 등의 일부 박스에만 손잡이 구멍이 존재한다.
강규혁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위원장은 “그동안 유통노동자의 근골격 질환은 마치 당연하게 여겨져 왔다”면서 “큰돈을 들여 해결해달라는 게 아니라, 박스에 손 하나 들어갈 구멍 하나 뚫어 달라고 하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이어 ”노사정이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동자의 사회적 고단함을 덜어내는 계기가 꼭 마련됐으면 한다“라고 덧붙였다.
한전진 기자 ist1076@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