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카이 성이 보이는 요트 정박지로 이동해서 요트를 탔다. 일행은 요트 2척에 나눠 탔다. 우리가 탄 요트는 레오라는 젊은 선장이 몰았다. 요트에 타서는 구명복을 먼저 챙겼다. 배를 타면서 구명복을 챙겨 입은 것은 처음이었다.
부다페스트 유람선 사고가 계기가 된 것이다. 그동안 배를 타면서 필요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눈치를 보느라 달라하지 못하던 것을 당당히 요구하게 된 것 뿐이다. 그나마 요트에 탄 사람은 모두 8명인데 구명복은 6벌 밖에 없었다. 이곳 역시 안전의식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레오 선장이나 김영만 가이드가 요트의 갑판에 올라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보라고 권했지만, 난간 같은 안전장치가 없어 보이는 갑판에 올라가는 사람은 없었다. 요트 뒤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소심하게 주변풍경을 즐겼는데, 수심이 30m에 달한다고 해서 긴장한 탓이다.
고3때는 선친께서 시작하셨던 유람선 사업장에 들여온 4인승 요트를 단신으로 몰아 커다란 호수를 누비던 때도 있었다. 겁이 없었을 때라서 였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맥주병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호수 위로 불어오는 바람도 적당하고, 마침 구름이 많아지면서 해를 가려준 덕분에 편하게 요트타기를 즐겼다. 호수 위에는 요트를 타는 사람들 말고도 패들보트, 오리배, 모터보트 등을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요트 위에서 트라카이 성을 구경하는 것으로 하고 5시 반에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로 출발했다.
참고로 트라카이 호수의 요트 정박장에서 트라카이 성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지나면 트라카이 마을의 동쪽에 있는 루카(Luka) 호수, 또는 버나딘 호수(Bernardinų)가 갈브 호수로 이어지는 다리를 지나게 된다. 리투아니아에서 살고 있는 최대석씨가 우연히 열기구를 탔다가 발견했다는 한반도의 모습을 닮은 호수다. 구글 지도를 열심히 뒤져본 결과 비슷한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에는 6000여 개의 호수가 전국에 흩어져 있는데 호수면적이 국토의 1.5%를 차지한다는데, 0.5ha(헥타르)가 넘는 것만도 2830개나 된다고 했다. 필자가 젊어서 공부하던 미국 미네소타 주에는 1만1842개의 호수가 있어서 ‘일 만개 호수의 고장(The land of 10000 Lakes)’라고 했기 때문에 크게 인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트라카이에서 빌니우스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우리는 유럽대륙의 중앙으로 접근해가는 셈이다. 유럽연합의 지리적 중심을 계산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프랑스 국립지리원(IGN)은 1989년 유럽의 국경이 재설정된 후 북쪽으로는 노르웨이 북쪽 섬인 스피츠베르겐 섬, 남쪽으로는 스페인에 속한 대서양의 카나리아 제도, 동쪽으로는 러시아의 우랄 산맥, 서쪽으로는 포르투갈의 아조레스 제도를 각각 동서남북 4극 지점으로 정했다.
이어 유럽대륙의 지리적 중앙 지점을 계산했다. 그 결과가 북위 54도 54분, 동경 25도 19분에 위치한 리투아니아의 푸르누시케이(Purnuskes)의 기리자(Girija) 마을이 유럽대륙의 중심이라고 발표했다. 수도 빌니우스 북쪽 26㎞ 떨어진 곳이다.
2004년 5월1일 유럽연합에 정식으로 가입한 리투아니아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푸르누시케이에 유럽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을 설치했다. 조각가 게디미나스 요쿠보니스가 제작한 기념탑은 화강암 기둥 위에 12개의 금색별을 둘렀다. 12개의 금색별은 유럽연합이 발족할 당시 가입국가의 숫자를 의미한다.
리투아니아가 EU의 핵심 국가들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상징하는 동시에 유럽대륙의 중심이라는 것을 표현했다. 또한 무게 8톤의 둥근 바위를 옮겨 ‘유럽의 정중앙’을 표시했다.
6시에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에 도착했다. 공식명칭이 빌니우스 성 스타니슬라오 및 성 라디슬라오 대성당(Vilniaus Šv. Stanislovo ir Šv. Vladislovo arkikatedra bazilika)인 빌니우스 대성당에서 버스를 내렸다. 스타니슬라오 성인과 라디슬라오 성인에게 헌정된 로마 가톨릭 대성당으로 리투아니아 가톨릭의 영적 중심이다.
리투아니아에 기독교가 전해진 것은 13세기 초이다. 리투아니아의 민다우가스(Mindaugas) 왕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리투아니아에 주교가 오기로 한 1251년, 왕은 가톨릭성당의 건축을 명했다. 성당을 건축한 장소는 이전에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믿던 페르쿠나스(Perkūnas) 신에게 예배를 드리던 장소였다.
하리투아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1387년에는 5개의 예배당이 있는 고딕양식의 성당의 건축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 성당은 1419년 화재로 불타고 말았다. 1429년 대관식을 준비하던 비타우타스 왕은 2번째 성당보다 더 큰 규모의 고딕성당을 지었다. 이 성당은 3개의 본당과 모퉁이에 4개의 원형 탑이 있었는데, 플랑드르에서 온 여행자 귈베르 드 라노이(Guillebert de Lannoy)는 폴란드 북부에 있는 프롬보르크(Frombork)의 성당을 닮았다고 적었다.
3번째 성당의 벽과 기둥은 오늘날까지 남아있지만, 성당은 여러 차례 화재와 전쟁으로 손상을 입었다. 1522년에 개조됐고, 1530년의 화재로 재건됐으며, 1534~1577년 사이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증축됐다. 1623~1636년 사이에는 지기스문트 3세 바사(Sigismund III Vasa)의 명에 따라 왕실 건축가 콘스탄티노 텐칼라(Constantino Tencalla)의 설계로 성 카시미르(St. Casimir) 예배당을 스웨덴 사암으로 지었다.
예배당의 내부는 1691~1692년 사이에 재건축됐다. 1666년에 무너진 남쪽 탑을 1769년 재건하던 중 무너져 예배당 둥근 천정이 파괴됐고, 6명이 죽기도 했다. 1779~1783년 사이에 로리나스 구세비치우스(Laurynas Gucevičius)의 설계에 따라 지금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재건됐다. 당시 빌니우스의 공공건물 건축의 관례대로 사각형의 구조에 따랐고, 건물 밖에 이탈리아 조각가 토마소 리기(Tommaso Righi)가 제작한 4명의 복음사가 조각으로 장식했다.
1786~1792년 사이에는 카지미에르 젤스키(Kazimierz Jelski)가 제작한 성 카시미르 상을 남쪽에, 성 스타니슬라우 상을 북쪽에, 그리고 성 헬레나 상을 중간에 배치했다. 카시미르 성인은 리투아니아를, 스타니슬라우 성인은 폴란드를 상징한다. 헬레나 성인은 9m 길이의 황금십자가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조각들은 1950년에 철거됐다가 1997년에 복원됐다.
빌니우스 대성당 왼쪽으로 돌아가면 리투아니아 국립박물관이 있다. 1952년에 설립된 리투아니아 국립박물관은 1855년에 폴란드 귀족이자 고고학자 유스타치 티스키에비츠가 설립한 빌니우스 고대박물관의 소장품 대부분이 1863년 1월 봉기 이후에 모스크바로 옮겨지고 남은 것을 빌니우스 공립도서관에 통합 재구성됐던 것들을 기반으로 한다. 대성당에서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서 있는 석상은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리투아니아 지역에서 신봉하던 토착종교의 신을 묘사한 것이다.
박물관 앞 정원에는 민다우가스 왕의 기념비가 있다. 민다우가스 왕의 대관식이 거행된 750주년을 기념해 2003년 7월 3일 공개된 이 기념비는 리투아니아의 화가이자 조각가 레지만타스 미드비키스(Regimantas Midvikis)의 작품이다. 높이 1.5m의 기념비는 왕좌에 앉아 왕의 상징인 레갈리아 홀과 십자가가 있는 공을 든 모습이다. 기념비의 좌대에는 가톨릭과 리투아니아 전통종교의 축제를 표시한 태양력이 새겨져 있다.
민다우가스(Mindaugas (1203~1263)는 흩어져 있던 부족들을 통합하며 리투아니아의 지도자로 추앙받았다. 1250년 무렵 교황 이노켄트 4세의 세례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왕으로 인정받아, 1253년에 대관식을 거행했다.
민다우가스는 리투아니아 최초의 기독교왕이 된 셈이다. 하지만 왕이 기독교로 개종했어도, 전통종교를 신봉하는 국민들은 여전히 많았다. 결국 1263년 민다우가스는 동서(同壻) 간인 프스코프(Pskov) 공작 다우만타스(Daumantas)와 결탁한 조카 트레니오타(Treniota)에 의해 암살당했다.
국립박물관 건물의 왼쪽으로 돌아가면 박물관의 별관인 옛 무기고이다. 기원전 1만1000년의 유물을 비롯한 4000점 이상의 고고학적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15세기 무렵 비타우타스 왕이 통치하던 시기에 세워졌고, 이후에 지속적으로 확장됐다. 17세기 초에는 약 180문의 무거운 대포를 확보하고 있었다고 한다.
국립박물관의 본관은 18세기 무렵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귀족 미할 카지미에르 오진스키(Michał Kazimierz Ogiński)가 지어 병영으로 사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크게 부서진 것을 1987~1997년 사이에 복원했다.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들과 옛 무기고 뒤편 게디미나스(Gediminas) 언덕 위에 있는 윗성 그리고 언덕 아래에 있는 대공 궁전과 리투아니아 대성당을 말하는 아랫성 등을 묶어서 빌니우스 성단지((Vilniaus pilių kompleksas(빌니우스 필리코 캄프리크사스) 혹은 Vilniaus pilys(빌니우스 필리스))라고 한다.
빌니우스에는 성단지의 윗성, 아랫성 그리고 네리스 강 건너 편에 있는 구부러진 성(Kreivoji pilis) 등 3개의 성이 있었는데, 구부러진 성은 1390년 튜턴기사단의 침공으로 불탄 뒤로 재건되지 않았다. 윗성은 옛 무기고 편에 있는 높이 40m 길이 160m의 게디미나스 언덕(Gedimino kalno)에 조성됐다.
빌니아(Vilnia) 강이 네리스(Neris) 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게디미나스 언덕은 빌니아 강의 지류가 언덕을 감싸는 천혜의 지형으로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9세기 무렵 방어 목적으로 쌓은 돌로 강화된 나무 벽이나, 10세기경 목조 성곽, 13세기쯤 갖춰진 탑이 있는 돌담으로 둘러싼 요새 등이 남아있다. 1365년부터 시작된 게르만족의 튜턴기사단의 8번에 걸친 공략에도 함락되지 않은 천혜의 요새였다.
15세기 들어 녹색 타일로 지붕을 이은 고딕 양식으로 윗성 재건이 시작됐고, 1422년에 마무리됐다. 윗성의 2층 건물에 있던 10×30m의 커다란 홀은, 13세기 튜턴기사단이 지은 폴란드 북부 말보르크(Malborku)의 마리엔부르크 기사단성(Ordensburg Marienburg)의 홀(15×30m)보다는 약간 작지만, 트라카이 섬 성에 있는 대공 궁전의 홀(10×21m)보다는 크다. 대지면적만 따지면 마리엔부르크 기사단성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성이다.
윗성은 16세기 이후 방치되면서 17세기 초까지 귀족들을 수감하는 감옥으로 일부 사용됐다. 1655년 러시아가 리투아니아를 침공했을 때, 이 요새에서 방어를 했지만 처음으로 함락됐다. 6년 후 폴란드-리투아니아 군이 수복했으나 이후에 방치돼 재건되지 않았다.
옛 무기고 뒤편 게디미나스 언덕을 배경으로 비타우타스 대왕의 동상이 서 있고, 그 오른편으로 윗성으로 올라가는 푸니쿨라가 있다. 왕복하는데 1유로를 내는 푸니쿨라를 타면 2~3분에 오를 수 있지만, 걸어서 올라가면 30분이 걸린다.
윗성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파괴돼 언덕 서쪽에 있는 게디미나스 탑과 동쪽에 건물의 일부가 남아있을 뿐이다. 1948~1949년 사이에 복원된 탑의 3층에는 성 박물관이 있고, 맨 위에는 전망대가 있어 빌니우스를 굽어볼 수 있다. 박물관의 입장료는 5유로나 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