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오늘 악마를 보았습니다.”
29일 ‘민식이법’, ‘하준이법’, ‘해인이법’ 등 아이들의 이름을 딴 통칭 ‘어린이생명안전법’의 국회 본회의 상정이 자유한국당의 ‘필리버스터(합법적 입법저지행위)’ 선언에 사실상 무산되자 한 피해가족이 눈물을 삼키며 스치듯 던진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날 느낀 좌절감을 한 마디로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앞서 한국당은 오후 2시 개회 예정이었던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의원총회를 열어 본회의 상정안건 199개 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 신청을 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에 대해 “우리는 민식이·하준이·태호·유찬이·한음이·해인이 법안을 통과시키고 싶다”면서도 “선거법 개정안을 상정하지 않는다면 필리버스터에 앞서 상정해 통과시킬 수 있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이를 들은 피해가족들은 오열과 분노를 쏟아냈다. 어떻게 아이들의 생명을 협상카드로 사용할 수 있냐는 반응이었다. 2017년 10월 경기도 과천에 위치한 놀이공원 주차장에 세워둔 차가 굴러로는 사고로 숨진 최하준 군의 어머니는 “오늘 우리나라 정치의 민낯을 봤다”며 “금수만도 못한 야만의 정치를 누가 하고 있느냐”고 강하게 비난했다.
지난 9월 충남 아산의 한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과속차량에 치여 사망한 김민식 군의 어머니도 “신호등 없는 곳에 신호등 만들어달라는 게, 대로변에 과속 단속 카메라가 없어 아이들이 위험에 처해있으니 카메라 달아달라고 하는 게 왜 협상카드가 돼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며 “이러라고 아이들의 이름을 내준 것이 아니다. 꼭 사과를 받겠다”고 말했다.
인천 송도의 한 사설축구클럽 통학차량 운전자가 과속에 이은 신호위반으로 교통사고가 나며 정유찬 군과 함께 세상을 떠난 김태호 군의 어머니는 “저는 5개월 임산부다. 이런 나라에서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라는 건지, 이 아이들이 이 땅을 밟고 살아갈 수 있을지”라며 말을 잊지 못했다. 김 군의 아버지도 “이게 나라라는 게 너무 싫다”고 원망 섞인 한탄만 토해냈다.
2016년 4월 경기도 용인의 한 어린이집 앞에서 교통사고후 응급조치가 늦어 목숨을 잃은 이해인 양의 아버지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생겼는데, 왜 아이들을 이용해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유를 꼭 듣고 싶다”면서 “지금 여기 있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살려달라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안전하게 키우게 해달라는 거다. 도대체 뭐하는 거냐”고 분노하기도 했다.
생업을 내려놓고, 아이들을 잃은 심정을 다른 아이들이나마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법을 통과시켜달라며 매일같이 국회를 찾아 죄인마냥 고개 숙이고 부탁하고, 심지어 무릎을 꿇으며 매달렸는데 돌아온 것은 정쟁의 도구로 전락한 자신들의 모습밖에 없다는 점에 절망하고 분노하는 모습이었다.
이와 관련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필리버스터 하겠다는 것은 4월 말까지 아무것도 처리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아이들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법을 엮어 합의 안 된 선거법은 상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최소한의 도의가 아니다. 답답하다”고 말했다.
이해식 대변인도 “민식이법을 볼모로 잡고 통과할 의양이 있는데 우리 때문에 못한다고 뒤집어 씌우려는 말도 안 되는 행태”라고 꼬집었다. 같은 당 이재정 의원 또한 “향후 법처리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민식이법을 지렛대 삼아 협박하며 문 걸어 잠그고 총선정국으로 가자는 것”이라고 국회가 사람으로는 해서는 안 되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언성을 높였다.
반면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오히려 국회의장과 민주당을 향해 날을 세웠다.
나 원내대표는 국회의장실을 항의방문하고 나와 “민생법에 대한 선처리를 요구했는데 필리버스터 철회하지 않으면 본회의에 응하지 않겠다는 것이 민주당의 뜻이었다. 국회의장도 민주당이 본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면 열 수 없다고 했다”며 “민생법안을 볼모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처리 하자는 입장”이라고 했다.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