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봉준호 감독이 밝힌 오스카, 그 후 [들어봤더니]

‘기생충’ 봉준호 감독이 밝힌 오스카, 그 후 [들어봤더니]

‘기생충’ 봉준호 감독이 밝힌 오스카, 그 후

기사승인 2020-02-19 15:35:48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10개월 만의 금의환향이다. 19일 열린 영화 ‘기생충’(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 기념 기자회견은 지난해 4월22일 제작보고회를 개최한 장소과 같은 곳에서 열렸다. 영화를 처음 소개하며 분량 발언으로 배우 최우식을 놀리던 감독과 배우들은 ‘기생충’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았다. 지난해 5월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수상하며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를 새로 쓴 ‘기생충’은 지난 9일(현지시간)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 등 4관왕에 오르며 한국영화의 새로운 100년을 열었다. 골든글로브와 영국 아카데미 등 각종 해외 영화제·시상식에서 거둔 상만 총 174개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생충’ 팀의 표정은 밝았다. 봉준호 감독과 바른손이앤에이 곽신애 대표를 비롯해 배우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박소담, 이정은, 장혜진, 박명훈, 그리고 아카데미 기술상 후보에 올랐던 한진원 작가, 이하준 미술감독, 양진모 편집감독이 차례로 등장했다. 봉준호 감독은 지난해 8월부터 지난주 아카데미까지 긴 오스카 캠페인 일정으로 지친 기색이었지만, 그의 말에선 좋은 성과를 거뒀다는 자신감과 여유가 묻어나왔다. 기자회견은 500여명의 취재진이 참석한 가운데 방송인 박경림의 사회로 통역 없이 1시간 조금 넘는 시간 진행됐다. 봉 감독과 배우, 제작진이 꺼낸 ‘기생충’, 그리고 오스카 시상식에 관한 이야기들을 인상적인 답변 중심으로 정리해봤다.



△ “제가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인터뷰를 600회 이상, 관객과의 Q&A를 100회 이상 했어요.”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이 진행한 오스카 캠페인을 ‘게릴라전’이라고 요약했다. 다른 경쟁작들이 큰 할리우드 스튜디오, 넷플릭스와 함께 진행하는 예산보다 훨씬 부족한 예산을 가지고 열정으로 뛰어들었다는 얘기였다. “코피 흘릴 일이 많았다”는 비유적 표현을 들며 “실제로 송강호가 코피를 흘리신 적도 있다”고 했다. 수많은 인터뷰와 관객과의 만남은 노력의 과정이었다. 처음엔 낯설었던 그 과정을 경험하며 “이렇게 작품을 밀도 있게 검증하는구나” 싶기도 했다. 그만큼 영화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과정으로 볼 수 있겠다는 얘기였다.


△ “제가 처음 캠페인 하는데 도발씩이나 하겠어요.”

일명 ‘로컬 영화제’ 발언에 대해 봉 감독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지난해 10월 미국 매체 벌처와의 인터뷰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은 국제 영화제가 아니고 매우 지역적인(로컬) 영화제”라고 발언한 것이 아카데미 시상식의 결과까지 영향을 미친 전략적 발언이 아니었는지에 대해 부인한 것. 봉 감독은 “당시 질문이 영화제 성격에 대한 이야기였다”며 “비교하다가 쓱 나온 이야기인데, 미국 젊은이들이 그걸 트위터에 많이 올렸나보다. 전략은 전혀 아니고 대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라고 설명했다.


△ “‘기생충’은 목표를 정하고 찍은 영화가 아니다.”

봉 감독은 다음 작품이 ‘기생충’의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고 선을 그었다. 몇 년 전부터 준비 중인 두 편의 새 영화에 대해 “‘기생충’과 관련이 없다”며 “평소처럼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생충’ 역시 평상심을 유지하며 찍은 영화인데 이 같은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고 했다. ‘기생충’이 그랬듯 좋은 작품을 정성스럽게 만들어보자는 기조를 앞으로도 유지할 거란 각오도 전했다.


△ “유세윤씨 참 천재적인 것 같아요.”

봉 감독의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소감은 여러모로 큰 화제가 됐다. 지난 18일엔 국내 개그맨 유세윤과 문세윤이 통역사 샤론 최와 봉 감독의 수상 소감 장면을 패러디한 영상이 올라오기도 했다. 봉 감독은 그 영상을 봤다며 “존경합니다”라고 칭찬했다. 이어 “문세윤씨도 최고의 엔터테이너이신 것 같다”고 덧붙였다.


△ “오늘 아침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님이 편지를 보내오셨어요.”

봉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 당시 감독상 수상 소감을 하며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헌사를 보냈다. ‘아이리시 맨’의 스코세이지 감독은 수상엔 실패했지만 봉 감독의 발언으로 청중의 기립박수에 일어나 화답하기도 했다. 이날 봉 감독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편지를 받은 소식을 전하며 “영광이었다”고 말했다. 편지 내용을 공개하진 않았지만 마지막에 “그동안 수고 했고 쉬어라. 대신 조금만 쉬어라”라는 문장이 있었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2017년 영화 ‘옥자’를 마친 후 번아웃 증후군 판정을 받았다는 일화를 얘기하던 중 “좀 쉬어볼 생각도 있는데 스콜세지 감독님이 쉬지 말라고 하셔서”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 “어떤 관객이 흑백으로 보니까 냄새가 더 나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기생충’은 오는 26일 흑백버전으로 다시 관객들을 만난다. 봉 감독은 “영화 ‘마더’도 흑백 버전을 만든 적이 있다”며 “고전 클래식 영화에 대한 동경이 있다. 세상 모든 영화가 흑백이던 시절이 있었잖아요”라고 계기를 설명했다. 자신이 1930년대에 살고 있다면, 그래서 ‘기생충’을 흑백으로 찍었으면 어떤 영화가 나왔을지에 대한 영화적 호기심이 컸다는 얘기였다. ‘기생충’의 흑백판을 두 번 봤다는 봉 감독은 똑같은 영화지만 “묘하다”며 색깔이 사라진 대신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연기와 섬세한 연기 디테일, 뉘앙스를 더 느낄 수 있다”고 귀띔했다.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흑백버전을 상영할 당시 한 관객이 남긴 ‘냄새 발언’을 언급하며 “처음엔 무슨 의미지 싶었는데, 그 의미를 더 생각해보게 됐다”고 했다.


△ “동 시대적인 문제를 굉장히 재밌고 심도 있게 표현한 작품”

이날 기자회견에선 ‘기생충’이 해외 각지에서 열풍을 일으키는 원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봉 감독은 “동시대적이고 우리 이웃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폭발력을 갖게 된 것 아닐까” 하고 짐작했고, 한진원 작가는 “아주 잔혹한 악당이 없고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립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을 짚었다. 직접 칸 영화제와 미국에서 봉 감독, 송강호와 함께 캠페인에 참여한 배우 이정은도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칸 영화제의 경쟁 부문 진출작들을 보면서 “제 생각엔 과거에 대한 회상을 다룬 영화는 많지만, 현 시대를 짚은 영화들이 그렇게 많이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또 스토리가 전개될지 모른다는 특징과 선과 악 구분 없이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가해자가 되고, 또 피해자가 되는 모습이 현실과 흡사해서 놀란 것 같다는 분석도 내놨다.


△ “‘체르노빌’처럼 5~6개 에피소드로 완성도 높은 TV시리즈를 만들고 싶어요.”

‘기생충’의 드라마화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영화 ‘빅쇼트’의 아담 맥케이 감독과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각 에피소드를 연출할 감독은 차차 찾게 될 거라고 설명했다. 아담 맥케이와 몇 차례 만나 얘기를 나누는 초기 단계일 뿐, 오는 5월 공개되는 ‘설국열차’가 5년이 걸린 것처럼 시간일 더 걸릴 거란 예상도 내놨다. 다만 ‘기생충’이 갖고 있는 주제 의식과 빈부격차 이야기, 블랙코미디와 범죄드라마 형식은 그대로 가져갈 예정이다.


△ “지금 젊은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 ‘기생충’과 똑같은 영화를 들고 왔을 때 투자받고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봉 감독은 해외에서 한국 영화산업 특유의 활기와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오는 원인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1999년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한 봉 감독은 “지난 20년간 눈부신 발전이 있었지만, 젊은 감독들이 이상한 작품을 만들거나 모험적인 시도를 하기 어려워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재능 있는 영화인들이 영화산업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독립영화를 만드는 평행선이 이어진다는 얘기였다. 봉 감독은 과거 붐을 일으켰던 홍콩영화의 쇠퇴를 언급하며 “그런 길을 걷지 않으려면 한국 영화산업이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bluebell@kukinews.com / 사진=박태현 기자

이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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