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글...
사전에 이 '잡글' 이라는 단어도 그 정의도 없다는 것은 꽤 의아스러윘다. 1970년대 후반 소위 신춘문예 극작가라는 타이틀을 얻고 나서도 얼마나 오랫동안 이 허명뿐인 잡글이라는 놈과 씨름하며 살아온 나 아니었던가!
땡전 한 푼과도 못바꿀 작품 대신 각종 월간지에, 사보에, 가십으로 가득 채운 신문 지면 등에 얼마나 많은 '잡글'로써 이름하여 고귀한? 생계를 유지해 왔던가!
해서 난, 사전에도 못 오른 그 잡글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비하할 생각은 없고, 그저 한때 극작가로서의 희곡작품 외의 모든 글을 잡글이라 일컬을 뿐이다.
잡글에는 소제, 주제도 아무런 제약이 없다. 꽃을 쓰면 꽃을 쓰고, 먼지를 쓰면 먼지를 쓸 뿐이다. '3'을 쓰기 위해 그저 '3'을 휘갈길 뿐이다.
그러나 '3'은... 1+1+1도, 1+2도, 4-1도, 752-749도... 게다가 3×1도, 999÷333도 = '3'이다. 이렇듯 3을 쓰고 표현하는 방법, 그것은 바둑의 수만큼 다양하다.
공식 같지도 않은 공식이지만, 이런 수많은 공식에 그때그때 원고청탁자의 니즈(?)에 맞춰 꽃과 먼지와 3을, 솥에 재료 넣듯 쏱아 부으면....
드디어 또 하나의 잡글이 튀어 나온다. 마치 원래 있었던 것처럼.
수많은 지면을 장식하는, 그 수만큼 많을 필자들이 공식에 대입하여 생산해 내는 '글'(여기선 잠시 '잡'자는 빼겠다)도 대게는 그러하다. 단지 쓰는 이와 그의 컨디션에 따라 조금은 뭉툭하게 또는 조금은 수려하게 치장될 뿐이다. 그저 3이나 1+2=3 보다는 루트9=3이 좀 더 있어 보이지 아니한가! 그럼에도, 누군가의 노래처럼 The ink is black, the page is white 일 뿐이다.
오래 전, 언제였던가 붓을 꺾었다. 절필이라고 하던가? 작품은 이미 내던진지 오래고, 잡글만 쳇바퀴처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을 즈음이다. 공장 콘베어 위로 끊임없이 쏱아져 나오는 나의 그 기성품 같은 잡글들, 그것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고 다른 의미 있는 일을 찾을 깜냥도 못됐지만, 의미없던 그 짓은 미련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
그런데 내친 원고지 대신 나이테만 괜히 두꺼워진 초보 농사꾼이 된 내게 글을 쓰라는 연락이 왔다.
벌써 여러 개월 전의 일이고, 이렇듯 해를 넘기고서까지 그 몇 개월의 매 일을 망설이고 있다. 나올 듯 말 듯 한 재채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글 쓰는 농부, 아니 왕년에 글 만들던 농부라는 게 아주 조금은 유의미했던가!
이번 청탁의 니즈는 어떤 잡글일까? 도대체 또 어떤 공식을 펼쳐 그 충분조건을 갖춘 잡글을 만들어 내라는 걸까! 써야하는 것인가? 아니 써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기왕 절필했던 난 이제 더 이상의 잡글도 작품도 맹글 생각이 없다. 아예 이젠 옛 공식에 대한 기억조차 없다.
흙과, 바람에 눕는 지친 풀들과 함께 얽혀가는 내 삶을 그저 소소하게 기록하는 것이라면... 그 정도까지라면 내 부러진 붓도 나를 용서하지 않을까!
해거름에 나의 그림자는 진작 한껏 기울어졌지만.. 그저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또 피부에 스쳐 살이 소리 지르는 대로 때론 바람이 속삭이는 대로...
그렇게 적는 것이라면.
이병도(농부/희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