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과몰입 상태를 빠져나오지 못한 기자가 작품을 보며 궁금했던 것들을 묻는 쿠키뉴스의 코너입니다. SBS ‘스토브리그’ 내용을 바탕으로 배우 윤선우와의 인터뷰를 그가 연기한 백영수의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야구깨나 봤다 하는 사람들에게 ‘로빈슨’은 ‘모르면 간첩’인 존재다. 폭염이 타자들의 장타율과 투수들의 평균자책점을 높인다며 여름 야구 때 장타에 강한 타자들을 배치하라고 조언한 칼럼 ‘더위는 모든 것을 바꾼다. 야구마저도’를 쓴 장본인이자, 백승수(남궁민) 전 드림즈 단장의 친동생. 로빈슨을 전력분석팀 신입사원으로 맞은 날 드림즈의 홈페이지는 환호하는 팬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만년 꼴찌 드림즈를 재건한 숨은 공신 로빈슨, 아니 백영수 씨를 서울 월드컵북로 쿠키뉴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Q. 지금은 내로라하는 전력분석가로 활약 중이지만, 고교 시절엔 전도유망한 선수였다고 들었다.
백영수: 타자로 뛰었다. 야구를 좋아해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마냥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다. 거듭된 체벌과 혹사에 야구에 흥미를 조금 잃기도 했고. 형(백승수 전 드림즈 단장)에게 ‘나 야구 그만하면 형이 공부 좀 알려주면 안 돼?’라고 묻기도 했는데, 형은 앞만 보고 달리라고 했다. 그러다 경기 중 사고를 당해 선수 생활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Q. 당시 심경은 어땠나.
백영수: 신체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무척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나를 보며 힘들어하는 가족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을 위해서라도 겉으로는 쾌활하게 지냈다. 속내를 많이 숨겼던 것 같다. 형 역시 말은 안 해도 자책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런 형에게 차마 ‘그러지 마. 형 잘못 아니랴’라고 얘기할 수 없었다.
Q. 이유가 뭔가.
백영수: 글쎄. 내 안에 있던 응어리가 완벽하게 해소되지 못했던 것 같다.
Q. 그러다가 드림즈의 전력분석팀에 입사하면서 다시 야구와 연을 맺었다. 백승수 씨가 드림즈에서 단장으로 있었던 때라, 채용 과정에서 특혜를 준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왔다. 백 전 단장은 그 일로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백영수: 형은 내가 야구 관련 일을 하는 걸 무척 싫어했다. 내가 야구 커뮤니티 ‘야구 만세’에서 ‘로빈슨’이란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고, 야구단 입사를 준비 중인 건 더더욱 몰랐다. 내가 드림즈 면접장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형은 내가 보험 계리사 시험을 보러 간 줄 알고 있었을 정도다. 면접날 집에서 크게 싸웠다. 처음으로 형에게 ‘내가 다친 건 형 책임이 아니니 이젠 그만 빠져나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남아있던 응어리가 완벽하게 풀린 것 같다.
Q. 전력분석팀은 다른 어느 팀보다도 선수들의 연습 장면을 많이, 그리고 반복해 봐야 한다. 혹시 그러면서 예전의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힘들지는 않은가.
백영수: 전혀. 물론 선수 시절엔 야구가 싫고 지긋지긋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내게 야구만큼 재밌는 건 없는 게 사실이다. 야구장 안에서 뛰는 것보다 야구 보는 걸 더욱 좋아하는 사람이 된 것뿐이다.
Q. 상사인 유경택(김도현) 팀장의 총애(?)를 받는 걸로 안다. 유 팀장은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둘의 ‘케미’가 조금 의외이긴 하다.
백영수: 팀장님도 입사 면접 땐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난 자신 있었다. 나는 세이버 매트릭스, 그러니까 수학적이고 통계학적인 분석을 적용해야 현대 야구가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적어도 통계·분석에선 나보다 잘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장애에 대한 편견만 없다면 말이다. 면접은 재밌었다. 상대가 뭐라고 해도, 내가 말로 다 이겨 먹을 수 있어서.(웃음)
Q. ‘말로 다 이겨 먹을 수 있어서 재밌다’니. 백 전 단장의 ‘요사스런 입’이 생각난다.
백영수: 하하. 사람들에게 형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회사에서도 내가 분위기 깨는 말을 한마디씩 한다. 누구는 나에게 ‘진지충’이라고도 한다.
Q. 다시 야구의 세계로 들어오면서 당신이 한 단계 성장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예전과 지금의 자신을 비교했을 때 가장 달라진 점은 뭔가.
백영수: 내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 것. 어렸을 때 난 다른 사람에게 끌려가는 편이었다. 특히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몸이 아파도 형이 달리라고 하면 달리고, 통계학과에 진학한 것도 가족의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드림즈 입사 전 형과 다툼을 계기로 내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선수 뽑아야 합니다’같은 말들을 아주 직접적으로, 백승수처럼 한다.
Q. 당신에게 드림즈와 야구는 무슨 의미인가.
백영수: 우선 야구는 한 마디로 ‘꿈’이다. 그리고 드림즈는 내게 또 다른 가족이다. 처음 입사할 때만 해도 ‘반드시 드림즈여야 한다’는 마음은 없었다. 형과의 관계를 풀기 위해 드림즈에 간 것도 아니었고. 다만 형에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싶은 용기가 그즈음 생겼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게 드림즈는 형 이외의 새로운 가족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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