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이렇게 쉽게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있을 줄이야. 지난 9일 처음 방송한 MBC 새 예능 프로그램 ‘부러우면 지는 거다’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이성 연인들의 데이트를 보며 연신 “(부러워서) 졌다, 졌어”를 외치는 MC들과 달리, 갈 곳 잃은 내 시선은 허공을 맴돈다. 취미 생활에만 1억 원 넘게 썼다는 배우 최송현을 보고 “1억 원이 있다는 것 아니냐”며 부러워하는 장도연의 모습에만 그나마 공감이 갔을 뿐이다. 분명하게 말해두는데, 이건 ‘부러움’이 아니다. 타인의 내밀한 사생활을 마주하는 데서 오는 ‘민망함’이다.
꼭꼭 숨겨져 오던 유명인사의 연애담을 솔직하게 보여준다는 점이 예능국 간부들에겐 신선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누구를 부러워한단 말인가. 프로그램 제목으로 쓰인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문장이 이미 오래된 유행어라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솔로는 커플을 부러워할 것’이라는 전제는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자발적인 비연애는 존중받지 못하고, ‘너희도 결국 부러워서 그런 거잖아’라던가 ‘네가 아직 좋은 사람을 못 만나서 그래’라는 식의 태도만 남는다. 요즘의 2·30대, 특히 이 세대의 여성들이 비연애를 외치는 이유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였다면 ‘부러우면 지는 거다’ 같은 제목은 절대 나오지 않았을 텐데…. MBC의 시간은 왜 이리 느리게 흐르는 걸까.
프로그램은 유명인 커플에게 ‘당당하게 연애하라’고 응원하지만, 정작 그 당당한 연애를 어렵게 만드는 게 미디어의 관음적인 시선이라는 점은 모른 척한다. 당장 이 프로그램만 하더라도, 유명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더욱 은밀히 관찰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제작진은 한술 더 떠서 역술가를 초대 손님으로 불러 “태생적인 연애 기질이나 궁합”을 봐주겠다고 나서고, 생면부지인 연인들에게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이면도 있는 거”라고 말한다. MBC ‘전지적 참견 시점’이나 채널A ‘러브시그널’ 시리즈에서 빛을 발한 ‘오지랖 오락’이다. 역술가는 별다른 활약 없이 스리슬쩍 모습을 감췄지만, 출연자들의 사생활을 ‘나노’ 단위로 쪼개 말을 보태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의 ‘연애 예찬론’은 예능계에서 이미 익숙한 얘기다. 젊은 남녀를 짝지어주려는 예능 프로그램의 강박적인 시도는 오랜 시간 비판의 대상이 됐는데, 심지어 최근에는 기혼 남성과 미혼 여성을 ‘러브라인’으로 묶으려다가 입길에 오른 프로그램도 있다. SBS ‘런닝맨’이다. ‘X맨’의 유산일까. ‘런닝맨’은 유독 남녀 출연자의 러브라인에 관심이 많았다. 래퍼 개리와 배우 송지효를 묶은 ‘월요 커플’이 인기를 끌자, 개리 하차 이후 송지효와 김종국을 연인으로 부추겼고, 배우 전소민과 개그맨 양세찬이 합류한 뒤엔 이들을 커플로 묶었다. 천하의 유재석도 MBC ‘무한도전’에서 광희와 유이를, KBS2 ‘해피투게더’에선 기안84와 엄현경을 커플로 엮으려다가 눈총을 받은 바 있다. 이런 ‘러브라인’이 많은 경우 당사자의 입장이나 감정을 무시한 채 이뤄진 데다가, 여성 출연자들을 ‘잠재적 연애 상대’로 한정하는 결과까지 낳아서다.
‘애인 없이 잘 살아’를 입에 달고 다니던 시절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너 같은 애가 가장 먼저 결혼한다’였고, 비혼을 선언한 여자 형제는 여전히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한다’는 집안 어른들의 잔소리에 시달린다. 미디어는 마치 이들과 한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 연인이 없는 개인을 불완전한 존재로 여기며, 그들을 ‘연애·결혼을 원하는 이성애자’로 가정한다. 심지어 자신이 비혼주의임을 여러 번 밝혀온 가수 김완선은 SBS플러스 ‘밥은 먹고 다니냐’에서 “지금까지 살면서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은 결혼 안 한 일”이라고 말하고도, ‘동료 연예인 중에 호감을 느낀 사람은 없냐’ ‘먼저 대시한 연예인은 없었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급기야 김수미는 “아직 임자를 못 만나서 그래”라고 훈수를 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 인정해야 한다. TV 예능 프로그램의 끝나지 않는 ‘연애 타령’이 결국 상상력 부족의 산물이라는 걸.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고? 미안하지만, 하나도 안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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