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윤은식 기자 =조선 독립의 열망을 총·칼로 잠재우려는 일제의 억압이 서슬퍼렇던 일제강점기에 기업을 일으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 기업인들이 있었다. '친일을 하면 삼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한다'는 속설에도 민족독립을 숙명으로 여겼던 기업인들이다.
안타깝게도 일제 탄압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독립운동 기업은 몇 안 된다. 광복 75주년을 맞은 올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창업주의 정신을 이어오는 기업들을 되새기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남다르다.
"당할 때 당하더라도 나라를 되찾고 겨레를 살리자는 구국의 청에 힘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돕는 일"
LG그룹 창업주 연암 구인회는 1942년 진주에서 '구인상회'라는 포목상을 운영하던 때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의 부탁으로 독립운동 자금 1만원을 흔쾌히 내줬다. 당시 전투기 한 대 값이 5만원 정도였던 것으로 보아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구인상회는 오늘날 LG·GS·LS의 뿌리가 된 곳이다.
허창수 GS그룹 명예회장의 조부인 허만정은 1919년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가 사업으로 수익을 일으켜 독립운동을 지원하자고 제안하자, 같은 해 민족기업가들과 함께 '백산무역회사'를 세웠다. 하지만 전국의 지점을 둘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1927년 해체됐다.
1920년 구인회는 허만정의 육촌 형제 허만식의 딸 허을수와 혼인하면서 구씨 가문과 허씨 가문은 사돈이자 동업자로 인연을 맺는다.
구인회와 허만정은 광복 후 락희화학공업사를 세운다. 허만정은 셋째아들인 허준구를 보내 경영수업을 받게 했고, 두 가문은 공동으로 '락희그룹'을 경영했다. 락희그룹은 지금의 LG그룹이다.
2005년 허만정의 후손들은 LG그룹에서 독립해 GS그룹을 세웠다. 두 집안은 LG그룹이 LG와 GS로 분리될 때까지 잡음 없이 회사를 운영했다.
LG는 민족자본가인 창업주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만해 한용운 기념관, 도산 안창호 기념관 등 독립운동 관련 시설을 개보수하고 있다. 또 국가유공자 자택 개보수 및 지원 사업도 매해 진행하고 있다.
서울 서소문동 순화동(현재의 덕수궁 롯데캐슬) 동화약품 옛 본사 건물 앞. 이곳에는 '서울 연통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연통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와 연락을 주고받고, 국내 행정을 담당하기위해 만든 조직이다.
동화약방(지금의 동화약품)을 설립한 은포 민강 선생은 연통부의 행정책임자였다. 우리나라 최초 신약인 '활명수'를 팔아 연통부를 통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했다.
동화약품 5대 사장인 보당 윤창식 사장은 민족경제자립을 위한 비밀조직인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를 조직해 자주독립의 기틀을 세웠고, 그의 아들인 윤광렬 회장도 일제 말기 학도병으로 징집됐으나 탈출해 광복군 중대장으로 맹활약하기도 했다.
"기업은 나라와 민족의 것이고 국민의 소유다"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는 독립을 위해 헌신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다. 1895년 평양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유 박사는 동양인 최초로 제너럴일렉트릭(GE)에 입사할 정도로 수재였다.
유 박사는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2년 '재미 한인'으로 구성한 '한인국방경비대' 창설을 주도했다. 1945년 미국 전략정보처 'OSS(지금의 CIA 전신)'의 '냅코작전(재미한인들을 훈련시켜 국내에 침투시키는 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eunsik80@kukinews.com
안타깝게도 일제 탄압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독립운동 기업은 몇 안 된다. 광복 75주년을 맞은 올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창업주의 정신을 이어오는 기업들을 되새기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남다르다.
"당할 때 당하더라도 나라를 되찾고 겨레를 살리자는 구국의 청에 힘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돕는 일"
LG그룹 창업주 연암 구인회는 1942년 진주에서 '구인상회'라는 포목상을 운영하던 때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의 부탁으로 독립운동 자금 1만원을 흔쾌히 내줬다. 당시 전투기 한 대 값이 5만원 정도였던 것으로 보아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구인상회는 오늘날 LG·GS·LS의 뿌리가 된 곳이다.
허창수 GS그룹 명예회장의 조부인 허만정은 1919년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가 사업으로 수익을 일으켜 독립운동을 지원하자고 제안하자, 같은 해 민족기업가들과 함께 '백산무역회사'를 세웠다. 하지만 전국의 지점을 둘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1927년 해체됐다.
1920년 구인회는 허만정의 육촌 형제 허만식의 딸 허을수와 혼인하면서 구씨 가문과 허씨 가문은 사돈이자 동업자로 인연을 맺는다.
구인회와 허만정은 광복 후 락희화학공업사를 세운다. 허만정은 셋째아들인 허준구를 보내 경영수업을 받게 했고, 두 가문은 공동으로 '락희그룹'을 경영했다. 락희그룹은 지금의 LG그룹이다.
2005년 허만정의 후손들은 LG그룹에서 독립해 GS그룹을 세웠다. 두 집안은 LG그룹이 LG와 GS로 분리될 때까지 잡음 없이 회사를 운영했다.
LG는 민족자본가인 창업주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만해 한용운 기념관, 도산 안창호 기념관 등 독립운동 관련 시설을 개보수하고 있다. 또 국가유공자 자택 개보수 및 지원 사업도 매해 진행하고 있다.
서울 서소문동 순화동(현재의 덕수궁 롯데캐슬) 동화약품 옛 본사 건물 앞. 이곳에는 '서울 연통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연통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와 연락을 주고받고, 국내 행정을 담당하기위해 만든 조직이다.
동화약방(지금의 동화약품)을 설립한 은포 민강 선생은 연통부의 행정책임자였다. 우리나라 최초 신약인 '활명수'를 팔아 연통부를 통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했다.
동화약품 5대 사장인 보당 윤창식 사장은 민족경제자립을 위한 비밀조직인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를 조직해 자주독립의 기틀을 세웠고, 그의 아들인 윤광렬 회장도 일제 말기 학도병으로 징집됐으나 탈출해 광복군 중대장으로 맹활약하기도 했다.
"기업은 나라와 민족의 것이고 국민의 소유다"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는 독립을 위해 헌신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다. 1895년 평양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유 박사는 동양인 최초로 제너럴일렉트릭(GE)에 입사할 정도로 수재였다.
유 박사는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2년 '재미 한인'으로 구성한 '한인국방경비대' 창설을 주도했다. 1945년 미국 전략정보처 'OSS(지금의 CIA 전신)'의 '냅코작전(재미한인들을 훈련시켜 국내에 침투시키는 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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