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은 무령왕의 ‘갱위강국 선언’으로부터 1500년, 무령왕릉 발굴로부터 50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521년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지 46년, 무령왕의 통치 20년째 되는 해였다. 백제는 비로소 위기를 넘기고 국제사회에 권토중래한 것이다.
무령왕은 웅진·사비 백제의 기틀을 튼튼히 놓은 중흥군주였다. 웅진 천도(475년)의 직접 원인이었던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유역을 회복하고 남쪽으로는 섬진강 일대를 확보했다. 왕권을 위협하던 귀족세력을 제어하고 좌평제를 22부제로 바꿨으며 넓힌 영토를 22담로제로 통치했다. 저수지를 만들고 농토를 늘려 생산력을 증대시켰고 비축양곡을 풀어 백성을 적극 구휼했다. 그의 아들 성왕은 부왕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왕위에 올라 16년째 되는 538년에 사비에 더 넓은 터를 닦아 수도를 옮겼다. 덕분에 백제는 무령왕의 직계 왕통이 660년까지 번성할 수 있었다.
또한, 무령왕은 중국과 일본을 확실한 우방으로 확보했다. 해상직항로를 개척해 송·제·양·진 등 남조와 활발히 소통, 교류했다. 왜국과는 역사상 가장 밀접한 관계를 형성해 마치 형제국에 하듯 각종 선진문물을 전해줬다. 나라 중흥의 기틀을 닦은 무령왕은 훌륭한 인품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무령왕은 백제의 가장 위대한 왕이면서 공주시의 자긍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새해 공주시는 시정 화두를 ‘갱위강시 동심동덕’(更爲强市 同心同德)으로 정했다. 무령왕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강한 공주시를 만들기 위해 한마음으로 함께 힘쓰자는 뜻이다. 무령왕 시절의 옛 영화를 재현할 수는 없다. 조선 선조 이후 330년간 충청감영·충남도청이 주재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다. 1500년 전 무령왕이 선언한 갱위강국의 뜻을 오늘에 다시 새겨 발전의 밑돌로 삼고자 겸허히 노력할 따름이다.
먼저 무령왕릉 발굴 50년, 갱위강국 선포 1500년을 기념하는 도안을 만들어 무령왕의 해임을 선포하고, 왕릉이 발굴된 7월 8일을 전후해 50주년 기념식을 거행한다. 국립공주박물관의 특별 전시와 국제학술회의 개최, 무령왕 전기 출간도 이어진다.
무령왕은 523년 음력 5월 7일에 서거했다고 왕릉 지석에 써있는 대로 특별한 추모제를 거행한다. 일본 북큐슈 가카라시마의 무령왕 탄생지에서 한-일 합동 기념제를 치르는 것도 하나의 목표이다.
8월 13일부터 29일까지는 ‘세계유산 축전’이 공주-부여-익산의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 열리고, 9월 초, 무령왕의 동상을 백제의 왕성이었던 공산성 앞에 세우는 것으로 후세의 추념과 존경의 뜻을 표할 것이다. 시민들이 함께 만들 기억상자에는 1448년 만에 빛을 본 무령왕릉처럼 이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기록들을 담을 것이다.
9월 18일 ‘대백제전’(제67회 백제문화제)이 공주에서 개막해 10월 3일 부여에서 폐막할 때까지 16일간 펼쳐진다. 2010년에 한 달간 ‘세계대백제전’을 치르면서 ‘1400년 전 대백제의 부활’을 노래했듯이.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속에서 새해를 맞으면서, 수많은 재난과 전쟁으로 민족 절멸의 위기를 겪었던 옛 시대를 그려본다. 한사람의 뛰어난 지도자에 의해 모든 난관이 극복되었을까? 그 시대 모든 이들의 인문적 지혜와 철학, 과학기술의 총합으로써 이겨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함께 손잡고 어깨 겯고 발맞춰 이 고비를 뚜벅뚜벅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동심동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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