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어필의 시대다. 겸손이 미덕이던 시대를 지나 이젠 본인을 자랑하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다. SNS 계정이 그 증거다. 어디서 무엇을 보고 어떤 멋진 경험을 했는지, 혹은 얘가 얼마나 귀여운지.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우리가 어찌나 다정한지. 바쁨 속에서도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인지, 유려한 언어로 깊이 있는 감상을 할 줄 아는 사람인지. 모든 순간을 기록하면 훗날 이력서가 된다. 경력을 쌓으려는 시작에 경력이 필요한 요즘, 지원서에 보유 SNS 계정 기재는 필수다.
그래서 요즘 대학생은 SNS 계정을 기본적으로 하나 이상 가지고 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전화번호보다 SNS 계정을 먼저 공유할 만큼 보편적이다. 그 공간을 능숙하게 꾸미며 자신을 대변하고 소통하는 도구로 이용한다.
그런 세태 속 외딴섬이길 택했다. 경력을 쌓기 위한 지원서에 쓸 계정도, 인맥을 넓히기 위한 소통 수단의 계정도 난 없다. SNS 계정이 강력한 무기가 되는 시대에 맨몸으로 서 있다. 그 무기가 자신에게도 향하는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SNS의 인기는 정체성을 찾고 싶어 하는 욕구와 맞닿아 있다. 현대 사회는 정체성을 찾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손쉽게 자신을 어떤 문자로 정의할 수 있길 원한다. 그런 욕구의 반증이 MBTI 성격 유형 검사 열풍이다. 하지만 이 유행은 자신과 서로를 이해하는 대신 편견과 무례한 단정을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하고 말았다.
우리 사회에서 정체성을 세운다는 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나 잘하는 일, 원하는 가치 등을 안다는 의미다. 특히 20살이 되는 순간 정체성을 결정해야 한다는 재촉이 시작된다. 자유로운 신체와 정신을 즐기며 동시에 하루빨리 미래를 정해야 인생의 유리한 고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대학생 때 정체성을 확립해 졸업 후 곧바로 사회에 진입해야 성공적인 흐름이다. 그래서 지금의 대학생은 정체성을 찾기 위해 수행한 과정과 성공한 결과물을 SNS를 통해 치열하게 전시한다.
결국 SNS는 편협한 단면이다. 생애 주기별 과제와 성과를 뭉쳐놓고 잘 팔릴 수 있게 잘라놓은 작업물에 불과하다. 효율을 중시하는 경쟁사회에서 함부로 재단하기 쉬운 수단으로 작용할 뿐이다.
정체성은 죽을 때 정의할 수 있다. 혹은 바로 그 직전 즈음에 가능하다. 어제의 교훈과 조금 전의 후회로 현재의 내가 달라졌듯, 시간은 우릴 끊임없이 변화하게 만든다. 그 변화가 멈추는 순간, 즉 우리의 시간이 다하는 때에야 최종적으로 어떤 내가 됐는지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하지 않는다. ‘지금을 증명해야 하는 건 아닐까’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정체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쓰는 일을. 당장 나를 급하게 정의해 보이지 않기로 했다. 섣부른 표현 속에 가두고 싶지 않다. 그럴싸한 포장을 위한 그럴듯해 보이는 일을 하느라 나를 놓칠 수 없다.
내가 누군지 맞춰보란 예민한 23살과 나를 조금 알 것 같단 25살 사이에 선 24살의 반항, 혹은 방황을 정식으로 선언한다.
“저는 지금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