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나이 때는 다 그래’긴 하소연을 듣고 난 후 후배에게 해준 조언이다. 활자로 적고 보니 아, 너무 건조하다. 아프고 힘든 후배에게 해줄 말은 아니었다. 꼰대는 되지 말자고 늘 되새김하면서 꼰대의 주된 화법을 내뱉고 말았다. 진중하고 낮은 목소리로 세상 사는 고단함을 들어줄 태도도 채 갖추지 못한 채 말이다.
청명한 대숲에 이는 바람은 찰나의 순간으로 스쳐 지나간다. 모든 청춘도 항상 머물지 않고 스쳐 지나간다. 젊음의 아름다움이 우리 곁을 시나브로 스쳐 지나가는 영화‘봄날은 간다’를 차라리 대답으로 권했어야 옳았다. 후회막심이다. 에둘러 그와 함께 한 시간이 있기에 이해하리라는 대책 없는 낙관에 의탁해본다.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차 들어가는 섭리가 인생의 나이듬이다. 청춘의 시대, 조우했던 경험치를 모두가 복기하며 산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가 살아낸 인생의 경험은 오늘의 일상적 처세와 확신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한 치 앞을 못 보는 인간인지라 여간해서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청춘을 이해하기도, 넘어서기도 쉽지 않다. 같은 하늘 아래 동일한 현상을 두고서도 나와 같은 기성세대는‘경험에서의 교훈’이라 힘주어 말하고 청춘들은 이를‘꼰대의 시각’으로 평가 절하한다. 여기서 분쟁은 끝나지 않는다. 이른바 ‘나 때는 말이야’의 ‘라테’ 출현으로 세대 간 소통은 만리장성에 가로막힌다.
나이가 들면 매해 세상의 모든 일에 조금씩 무디어 간다. 그래도 자신의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면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다. 치기 어린 자신감보다는 이유 있는 단단함으로 가득 차간다면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오며 여기저기 상처도 많이 입었지만, 그 상처들이 단단하게 아물면서 굳건한 내면의 방어막이 형성돼 있어야 어른이다. 허나 그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헤르만 헤세의‘데미안’은 어떻게 어른이 되어 가는가를 깨닫게 해준다. 인간 내면을 면밀하게 표현하는 세밀한 문체는 어른이 아닌 꼰대들에게 일갈한다. “자신의 감정들의 한 부분을 생각 속에서 수정하는 법을 익힌 어른”,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 이분화되어 있는 경계를 허물어 가는 것”다시 읽어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명문장이다.
우리는 어떻게 어른이 되어 가는가?, 진정한 어른은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되는가? 어쩌면 영원히 풀 수 없는 근원적 질문의 답은 의외로 명료할 수도 있겠다. 양극화된 사고를 넘어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오는 순간의 행복은 일상에서 휘발된다. 그러나 순간의 행복이 어긋날 때 여지없이 그 관계의 고통은 오래도록 각인된다. 미움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태반이 행복해도 그 기억은 가뭇하고 작게 균열된 관계의 고통은 오래도록 뇌에 저장된다. 인간의 무리 속에서의 행복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늦은 밤 걸려온 전화기 너머 후배처럼 고통의 시간은 삶의 결결마다 타인으로부터의 위로를 간절하게 기다리며 살아간다. 흐드러진 봄꽃을 기다리며 세상살이에 치여 고단해 하고 있는 후배에게 미처 못 한 말을 대신한다. ‘환자와 동료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구름 같은 욕심으로 살다 보니 상처받고 외로운 널 보듬지 못했어. 힘들어 아는 아우가 혼자가 아니라는 절절한 연민의 말을 건네지 못해 많이 미안해’
사람에 치이고 일에 포박당하며 비루한 일상만 주렁주렁 매달려 삶을 쇠락시키는 나이를 향해 나아가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천박한 물질이 득세하는 세상일지라도 통속적 관계를 넘어 타인을 진심을 다해 아끼고 그 존재를 사랑하고 있다는 진정성은 채우고 채워도 끝이 없는 어른으로서의 드넓은 곳간이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자. 후배의 강건한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