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엄마, 사랑해"

[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엄마, 사랑해"

이정화 (주부 / 작가)

기사승인 2021-05-10 12:50:05
이정화 작가
엄마는 팔순이 넘어 어느 날, 내 마음속에서 은빛 물고기가 되었다. 엄마가 점점 더 자주 잊고 자주 묻는 짧은 기억력만을 갖게 되었을 때, 아직도 내가 엄마의 변화를 믿지 않으려 했던 때, 나는 엄마에게 악질 선생같이 굴었다. 엄마가 같은 것을 물을 때마다 스스로 기억해보라고 다그쳤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엄마가 물고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기로 하였다. 물고기의 기억력은 3초라는데, 원래도 소원을 들어주는 동화 속의 금물고기처럼 뭐든 내게 척척 해주던 엄마도 이젠 진짜 물고기가 된 거라고... ‘엄마가 치매’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엄마는 머리칼 세듯 금빛이 세어 어느새 은빛 물고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나는 좀 덜 슬펐고 엄마는 여전히 예뻤다.

하루는 그런 엄마에게 어항을 놓아드렸다. 어쩌면 적적한 엄마는 3초마다 새롭게 금붕어를 반가워하실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금붕어는 곧 혼탁해진 물속에서 모조리 배를 뒤집고 죽어버렸다. 모든 걸 금세 잊는 엄마가 물고기 밥을 준 걸 잊고, 자꾸 또 줬기 때문이었다. 어항을 치우며 나는 엄마가 나도 3초 만에 잊을까 슬펐지만, 우리 엄마는 또 3초 만에 다시 나를 사랑할 것이 분명했다. 

엄마는 구순이 넘어 점점 젊어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엄마 나이를 물었을 때, 그새 내 나이만큼 젊어져 있던 엄마는 나를 한동안 바라보다 울먹이셨다. 당신은 그대론데, 이상하게도 훌쩍 늙어버린 딸을 몹시 짠해 하셨다. 엄마의 귀가 더 어두워진 게 먼저인지, 엄마의 정신이 더욱 흐려진 게 먼저인지, 엄마와 대화를 많이 하지 못하게 된 뒤에도 나는 엄마에게 종종 나이를 물었다. 치매가 걸리고도 기적처럼 매일 우리를 알아봐 주시는 엄마의 기억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질문 중 엄마가 금세 반응하는 게 그것이었다. 

엄마와 어항. 그림=이정화.

그러나 엄마의 대답은 늘 엉터리였다. 엄마의 나이는 시간이 갈수록 적어졌다. 전에는 ‘한 팔십 세쯤’이라고 하셨다가, 그 뒤엔 ‘일흔 살이 넘었다’고 하셨다가, 나중엔 ‘예순 두세 살 되었을 거’라고 답하셨다. 처음엔 기억을 바로잡아보려 했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엄마의 대답을 고쳐드리지 않았다. ‘젊게 사는 게 뭐 어때서! 우리 엄만 점점 젊게 사시는 것’이라고 내 자신에게도 우겨댔다. 그리곤 더이상 엄마에게 나이를 묻지 않았다. 엄마가 나날이 젊어지는 건 좋지만 딱 거기까지가 좋아서였다. 이제는 나와 친구가 되어 나와 엇비슷하게 살다 갈 수 있을 그 나이까지가 좋았다. 

최근 엄마는 거의 말을 안 하신다. 나를 보면 한없이 반가워하고 음식도 내 앞으로 밀어주지만, 목소리를 내지 않고 진짜 물고기가 된 듯 입만 뻐끔거려 의사를 전하신다. 크게 말해보라고 성화를 해도, 말하는 걸 잊으신 건지, 아님 당신 목소리가 당신 귀에도 잘 들리지 않아서인지, 엄마의 목소리를 키우기는 어렵다. 그러다가도 내가 등이 간지러워 혼자 긁으려 들면 얼른 내 등을 긁어주는 엄마에게 나는 ‘엄마, 사랑해’라고 말하는데, 신기하게도 엄마는 그 말만은 찰떡같이 받아서 ‘나도 사랑해’하고 크게 답하신다. 고맙다는 말에도, 죄송하단 말에도 아무 기색 없다가, 사랑한단 말에만 답을 하는 엄마를 보면 엄마는 평생 사랑밖엔 모른다. 

오래전 한 음악회에서 오백 년도 더 된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많이 울었던 적이 있다. 음악도 명곡이었고 연주도 훌륭했지만 내가 울었던 이유는 그 악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저 오래된 나무 조각에 불과했을 그 바이올린이 세월과 함께 명기로 남은 것을 생각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늙고 약해져 빛을 발하는 ‘사람’이란 존재는 참으로 허무하고 안타까웠다. 그때, 어찌해야 사람도 저 바이올린처럼 세월과 함께 더 빛날 수 있을지, 부모는 무엇으로 계속 남을 수 있을지 생각하였다. 이미 아버지는 오랜 투병 중이셨고 엄마는 치매가 깊어진 때였다. 그리고 명기를 증명하는 것이 그것을 갈고닦은 뛰어난 연주자라면, 부모의 이름을 규정하는 건 훌륭한 자식일 텐데 나는 여전히 시시하고 보잘것없을 때였다.

그날의 통곡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지금도 내 부모를 위해 내세울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억뿐이다. 더 오래 더 많이 내 부모를 되새기는 것뿐이다. 나를 떠나셔도 나를 잊으셔도 ... 때로 상처에는 망각이 위로가 되겠지만, 존재는 기억으로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부모는 그러지 않을까, 나의 기억이 당신들을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진 모를 일이지만 우리는 기억을 통해 시공을 넘어 서로 닿지 않을까.
최문갑 기자
mgc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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