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룹 우주소녀 유닛그룹 우주소녀 더 블랙은 신곡 ‘이지’(Easy)로 활동하던 지난 3주 동안 바지 정장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설아·엑시·보나·은서의 카리스마를 보여주기 위한 의상이었다. 무대에서 네 멤버는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아 호방함을 드러내고, 재킷 사이로 등 근육을 드러내 건강미를 과시했다. 데뷔 초 발랄하고 풋풋한 분위기를 내세워 ‘청순돌’로 불리던 이들의 반전 매력이다.
강인함과 과격함을 ‘남자다움’으로, 가냘픔과 귀여움을 ‘여자다움’으로 설명하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요즘 아이돌 그룹 무대 의상 트렌드는 ‘젠더리스’(성 구분을 허문 패션 경향)다. 그룹 엑소 멤버 카이가 2018년 ‘템포’ 활동 당시 크롭티를 입어 화제를 모은 뒤, 남자 아이돌 사이에선 크롭티가 유행했다. ‘어드바이스’ 뮤직비디오에서 짧은 후드 티셔츠로 허리선을 드러낸 태민을 비롯해 그룹 세븐틴, 아스트로,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등도 크롭티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 실루엣을 드러내는 시스루 의상이나 손톱을 장식하는 네일아트, 심지어 팔·다리·겨드랑이 등 신체 제모도 ‘남돌’ 스타일링의 일부가 됐다.
여자 아이돌에겐 셔츠와 넥타이를 포함한 정장 착장이 필수 코스가 됐다. 데뷔 15주년을 맞은 그룹 브라운아이드걸스부터 소녀시대, 마마무, 우주소녀, 드림캐쳐, 위키미키, 써드아이 등 세대를 막론하고 여러 여자 아이돌이 바지 정장 차림으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섹시 걸그룹’으로 유명세를 떨친 그룹 AOA는 2019년 Mnet ‘퀸덤’에서 신체 노출 없는 정장을 입고 무대에 올라 화제를 모았다. 플리츠스커트가 유일한 정답으로 여겨지던 스쿨룩 콘셉트도 다양해지고 있다. 그룹 위클리는 지난해 노래 ‘지그재그’ 활동 당시 반바지를 입고 무대를 누볐다. 온라인에선 ‘신선하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이런 변화는 성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려는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는 “K팝 시장은 성적 대상화에 노출된 분야인 동시에, 대중의 반응에 극도로 민감한 시장이기도 하다”며 “최근 몇 년 간 확산한 페미니즘 무브먼트가 아이돌의 과도한 성적 대상화에도 영향을 끼쳤고, 이런 움직임이 의상에도 자연스레 반영된 것”이라고 짚었다. 그룹 브레이브걸스는 4년 전 ‘롤린’(Rollin’)으로 활동할 당시 몸에 달라붙는 의상으로 섹시한 이미지를 내세웠지만, 청량한 곡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아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올해 초 ‘롤린’이 뒤늦게 주목받자 팬들은 ‘만약 다시 활동한다면 콘셉트를 바꿔달라’고 요청했고, 소속사는 이를 수용해 의상 콘셉트를 발랄하게 바꿨다. 멤버들의 몸 선을 강조한 음반 표지도 팬들 요청에 따라 교체했다.
의상만 변한 게 아니다. 김 평론가는 “안무와 동시에 가사에서도 성별 고정관념이 옅어지는 추세”라고 진단했다. 태민은 2017년 발표한 ‘무브’(Move)에서 성 구분이 모호한 퍼포먼스를 선보여 호응을 얻었다. 데뷔 초 “여자가 쉽게 맘을 주면 안돼”(‘치어 업’)라고 노래했던 그룹 트와이스는 지난해 내놓은 노래 ‘아이 캔트 스톱 미’(I Can’t Stop Me)에서 ‘이게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I know it’s not right / I Can’t stop me)며 통제 불가능한 뜨거움을 분출했다.
김 평론가는 “성별 고정관념에 따른 이미지가 고착화될수록 해당 성별에 대한 대상화도 심해질 수밖에 없다”며 “최근의 변화는 정형화되거나 금기시되어 왔던 이미지들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K팝 아이돌 산업의 여러 특징이 성별 고정관념을 극대화하는 한편 아이돌 자체를 착취하며 성장해온 부분이 있다. 이런 관습을 깨뜨리려는 움직임이 결국 K팝 문화의 자생력을 강하게 만들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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