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하!” 현장엔 늘 호쾌한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제작진과 배우들이 ‘잘 만들자’는 일념 하나로 구슬땀을 흘리는 현장이었다. MBC ‘옷소매 붉은 끝동’을 연출한 정지인 감독의 호탕한 웃음은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응원이었다. 배우들도 종영 후 인터뷰를 할 때마다 정 감독에게 공을 돌렸다. 뛰어난 영상미와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는 섬세한 연출법, 늘 밝음을 잃지 않는 모습은 드라마 팬들에게도 화제였다. 드라마 메이킹 영상이 공개되면 “감독님 웃음소리만 들린다”, “웃음소리가 들려야 안심된다”는 반응이 속출했다. 정지인 감독은 이름에 신을 뜻하는 ‘갓’(God)이 붙여져 ‘갓지인’이 됐다.
이 모든 반응에 정지인 감독은 “얼떨떨하다”고 말했다. 12일 쿠키뉴스와 서면으로 만난 정 감독은 “원작과 대본, 배우, 스태프 모두를 믿어서 좋은 반응은 기대했지만, 이 정도까지 반향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며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라는 소감을 전했다. 시청률이 오를 때마다 마음을 더욱 다잡았단다. 그는 탄탄한 원작에 고증을 더하고 살을 붙여가며 작품에 진정성을 더했다.
“좋은 원작 덕분에 방향을 확실히 잡고 진심을 전달할 수 있었어요. 원작 소설이 나온 이후 새로이 발굴된 정조와 의빈 성씨 기록을 담는 데에도 주력했죠. 의빈 성씨가 혜경궁 홍씨 집안의 청지기 딸이라는 사료를 바탕으로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냈어요. 덕임(이세영)이 이산(이준호)을 보위에 올리는 부분과 이산이 덕임을 대비(장희진)와 화빈(이서)의 음모에서 구하는 내용을 담았어요. 각색하면서도 기본적인 고증은 충실히 지키려 했고요. 예법, 말투, 복식, 소품, 궁중 행사 등 여러 고증을 살리려 노력했습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고증이 탄탄한 사극으로도 초반 입소문을 탔다. 기존 사극에 나오지 않던 자가, 마노라와 같은 호칭과 친잠례, 계례식 등 다양한 요소가 녹아들며 호평을 얻었다. 궁녀들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정 감독은 멈춰있는 역사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 생생한 공간에서 모든 캐릭터가 실재하며 생동적인 감정을 전하는 건 그가 세운 목표였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도 볼거리였다. 주인공 덕임을 비롯해 여러 궁녀는 제한된 상황에서도 저마다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 감독은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선택하는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사극에서 여성의 주체성은 명확한 한계를 가져요. 그 한계를 어느 선까지 넘을 수 있는지 매번 시험대에 선 기분이었어요. 작가님의 서사 속에서 원작에 나온 궁녀의 마음과 생각을 전달하려 했어요. 사소한 것이어도 본인 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덕임이를 보여드리고 싶었죠. (이)세영 씨와는 첫 미팅부터 마지막 촬영까지 늘 덕임이의 마음이 어떤지 물어봤어요. 원작을 바탕으로 대본을 읽어가며 세영 씨가 생각하는 덕임의 마음을 나침반으로 삼았어요.”
마지막 엔딩에서 덕임의 마음은 말 한마디 없이도 온전히 이산에게 전달된다. 비로소 두 사람의 순간은 영원이 된다. 이세영과 이준호의 열연은 드라마의 큰 동력이었다. 감독은 두 배우와 틈틈이 대화를 나누며 캐릭터를 탄탄히 잡아갔다. 이세영의 감정을 기반으로 덕임을 만들었다면, 이산은 이준호의 판단에 따랐다. “원작과 기록을 바탕으로 이산을 충실히 구현하려 했다”고 말을 잇던 감독은 “이준호와 캐릭터 설정을 의논하며 이준호만의 이산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고 회상했다. 자세와 생활습관부터 이산에 맞게 바꿔 가는 이준호를 보며 감독은 자신감을 얻었다. 감독은 “세손 시절부터 왕으로 세월이 바뀌는 걸 발성과 톤을 조절해 표현하더라”면서 “이준호가 곧 이산이었다”고 극찬했다. 이들 외에도 함께한 배우들 모두가 최고의 순간을 만들어냈다.
“세영 씨는 최선을 다해 표현하고 감독에게 최대한 많은 선택지를 안겨주는 연기자예요.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연기를 고쳐나가면서도 모니터링은 하지 않거든요. 이유를 물었더니 ‘감독님이 알아서 할 테니 안 봐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고마웠어요. 준호 씨는 현장에 오기 전에 모든 걸 완벽히 준비해왔죠. 긴 대사도 막힘없이 소화하면서도 감정 연기도 섬세히 해내요. 영조 역을 맡은 이덕화 선생님은 변덕과 명민함, 제왕의 카리스마를 모두 갖추셨어요. 이덕화의 영조가 드라마에 여러 흔적을 남겼다고 생각해요.”
감독은 강훈(홍덕로), 박지영(제조상궁), 조희봉(좌의정), 서상궁(장혜진), 오대환(좌익위), 강말금(혜경궁 홍씨)과 이민지·하율리·이은샘(궁녀 복연·경희·영희) 등 배우들을 나열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깊은 여운을 남긴 ‘새피엔딩’(새드엔딩과 해피엔딩을 아우르는 신조어)에 대해서는 “드라마의 목표였다”고 설명했다. 감독은 원작 결말을 보자마자 ‘옷소매 붉은 끝동’을 드라마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꿈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결말을 위해 작가와 수많은 논의 과정을 거쳤다. 이들의 뚝심이 작품의 완성도에 방점을 찍은 셈이다. 감독은 “방송이 끝나고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촬영장에 있는 꿈을 꾼다”면서 “한동안은 잊는 게 어려울 것 같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모든 순간이 기억에 남아요. 촬영 장소부터 준비 과정, 작은 소품 하나하나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떠오르곤 해요. 시청자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초록빛 여름 속을 해맑게 뛰어가던 덕임을 기억해주세요. 그런 덕임을 잊지 않았던, 눈 내리는 시린 하늘을 물끄러미 보던 이산도 떠올려주세요. 둘은 결국 행복하게 재회하니 너무 슬퍼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랑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산과 덕임을 사랑한 것 이상으로 저도 둘을 사랑했습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