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한계에 가두지 않는다. 편견을 깨고 벽을 뛰어넘는다.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결국 스스로가 새로운 표준이 된다. 누군가에겐 도전이고, 다른 누군가에겐 무모한 모험이다. 박수 받은 순간보다 외로운 순간이 더 많았을 시간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꾸준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여성들의 행보는 그래서 더 값지다. 잘해왔고, 잘해낼 여성들의 순간들.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쿠키뉴스 대중문화팀이 배우 이정은, 방송인 박소현, 배우 이유미 순간들을 돌아봤다.
생각보다 빨리 잘 된 이정은
배우 이정은을 처음 본 순간이 언제였을까. 1991년부터 연극배우로 활동하다 2010년대 초부터 영화, 드라마에 모습을 비춘 이정은의 처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느 작품에서 보다가 ‘아, 그 배우가 이 배우였어’라고 뒤늦게 깨닫고 출연작을 되짚는 쪽에 가깝다. 그러고 보면 tvN ‘오 나의 귀신님’의 욕쟁이 보살 서빙고도 이정은이었고, 영화 ‘검사외전’(감독 이일형)에서 한치원(강동원)과 붐바스틱을 추는 선거 운동원도 이정은이었고, 영화 ‘미성년’(감독 김윤석)에서 권대원(김윤석)에게 주차료를 갈취하는 만취 아주머니도 이정은이었다. tvN ‘눈이 부시게’로 백상예술대상 조연상을 받았고,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으로 국내 시상식 조연상을 휩쓴 이후에도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영화 ‘내가 죽던 날’, ‘자산어보’, KBS2 ‘동백꽃 필 무렵’을 동시에 찍으며 일에 매진했다. 이정은은 2019년 ‘기생충’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을 받은 후 “스포트라이트가 너무 늦게 비춰진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데, 전 이만한 얼굴이나 이만한 몸매가 될 때까지 시간이 분명 필요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쿠키뉴스와의 인터뷰에선 “이렇게 뒤늦게 잘 됐다고 하는데, 제 생각보다는 빨리 잘 됐어요. 전 60세가 넘어서 잘 될 줄 알았거든요”라고 말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멋진 배우가 한국에도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박소현
방송인 박소현은 늘 우리 가까이에 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가 한 순간에 추락하거나, 천천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상승 곡선을 그리는 연예인들과는 다르다. 기복 없이 언제나 주어진 제 역할을 해주는 편에 가깝다. 그것도 아주 긴 시간 동안. 1993년 쇼 프로그램과 드라마로 데뷔한 박소현은 배우보다 MC로 이름을 알렸다. SBS ‘호기심천국’에 이어 MC 임성훈과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MC를 맡은 게 1998년이다. 1100회를 넘기는 24년 동안 박소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다음 해에 DJ를 맡은 SBS 파워FM ‘박소현의 러브게임’ 역시 오늘도 방송 중이다. 지난해까지 5년 동안 MBC ‘라디오스타’의 여성 MC 버전인 ‘비디오스타’에 후배들과 출연하며 중심을 지킨 것도 박소현이다. 20대 초반 부상으로 발레를 그만둬야 했던 과거의 기억이 아이돌 멤버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수많은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특징과 생일까지 기억하는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2017년 방송된 ‘수상한 가수’에서 박소현은 공백기를 겪고 있는 빅스타 래환에게 “우리가 꼭 기억할게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이와 시대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는 꾸준함과 공감 능력은 그를 오늘도 방송에서 만날 수 있게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를 쓰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올 타임 레전드’ 여성 연예인은 박소현이지 않을까.
아주 잘 기다린 이유미
아직 배우 이유미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은 그의 이름을 알린 대표작이 됐지만 출연하는 분량은 많지 않다. 다음 출연작인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도 몇 회만 등장하고, 영화 ‘인질’(감독 필감성)에서도 눈에 띄는 역할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난해 공개된 눈에 띄는 작품마다 이유미가 있었고,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비슷한 일은 예전에도 있었다. 영화 ‘박화영’(감독 이환)에서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한 세진 역할로 출연한 이유미는 후속작인 ‘어른들은 몰라요’(감독 이환)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한다. 눈에 띄는 수많은 캐릭터를 뚫고 다음 이야기가 가장 궁금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힘이 이유미에게 존재한다. 최근 1~2년 사이에 갑자기 주목받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이유미의 시간은 길었다. 아역부터 활동한 13년차 배우로 중학교 때부터 보조 출연과 엑스트라 출연을 해왔다. 일이 없는 시간엔 고민이 많아졌다. 최근엔 갑자기 생긴 쉬는 기간에 식당이나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직업을 바꿀 고민은 없었다. 이유미는 쿠키뉴스와 인터뷰에서 “잘 기다려보자. 조급해하지 말고 좀 기다려보자”고 생각했다며 “이 길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어떻게 해야 더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다”고 말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없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내 살아남은 배우가 있다. 앞으로 더 많은 대중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제부턴 이유미의 시간이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