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와 그래미, 그 끝에 남은 질문 [친절한 쿡기자]

오스카와 그래미, 그 끝에 남은 질문 [친절한 쿡기자]

기사승인 2022-04-06 06:00:29
(왼쪽부터) Mnet에서 제64회 그래미 어워즈를 생중계한 태인영, 배철수, 임진모. 방송 캡처

지난달 말 미국 뉴욕 퀸스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한국계 여성 장모씨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강도 3명이 휘두른 칼에 등을 맞았습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던 장씨는 일자리를 잃을까 걱정해 사건 다음날에도 출근했다는군요. 뉴욕에서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지난 2년 간 3배 넘게 늘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 정권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대유행을 겪으며 극에 달한 미국 내 인종차별의 현주소입니다.

지난 4일(한국시간) Mnet이 생중계한 제64회 그래미 어워즈를 보다가 퀸스에서 벌어진 강도 사건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미국 내 아시아인 혐오를 화두로 꺼낸 중계진 때문이었습니다. 지난해 미국을 여행했다는 동시통역사 태인영씨는 “현지인들에게 들으니 아직도 그런(아시아인에 관한) 편견이 존재한다고 한다”며 이렇게 부연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에겐 관대해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곁에 앉은 가수 배철수가 그룹 방탄소년단, 배우 윤여정 등을 언급하며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고 호응하자,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뿌리박힌 그런 나쁜 것들(인종차별)도 문화의 힘으로 극복된 걸 본 거 같아서… 편안한 마음으로 다닐 수 있었습니다.”

궁금합니다. 우리는 한국인 혹은 한국계 미국인을 향한 ‘관대’한 시선에 감사라도 해야 할까요. 이것이 ‘문화의 힘’이라며 자부심을 느껴야 할까요. ‘그런 나쁜 것들’은 피해 당사자가 자력으로 ‘극복’해야 하는 걸까요. 현재진행형인 아시아인 혐오를 ‘국뽕’의 땔감으로 삼은 발언은 과연 적절할까요. 공교롭게도 시상식 다음날, 호주 뉴스프로그램 더 프로젝트가 그래미 어워즈에 참석한 방탄소년단 멤버 뷔의 모습에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합성해 인종차별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문화의 힘으로 극복했다는 허황된 믿음이 하루 만에 산산조각 난 셈입니다.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한 제이다 핀켓 스미스(왼쪽), 윌 스미스. AP 연합뉴스

실재하는 차별을 은폐한 혐의는 앞서 열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있습니다. 배우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삭발 머리를 조롱했다가 남편인 윌 스미스에게 뺨을 맞은 코미디언 크리스 록 이야기입니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윌 스미스와 달리, 록은 승승장구하는 모양이더군요. 윌 스미스가 록에게 사과하며 밝혔듯,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런 질문은 던져볼 수 있겠습니다. 왜 어떤 이들은 록의 농담을 듣고도 웃지 못했을까요.

제이다 핀켓 스미스는 2018년 탈모증을 앓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탈모증은 흑인 여성들이 특히 자주 앓는 질병입니다. 2016년 실시된 조사에서 흑인 여성 5596명 중 절반가량이 탈모를 경험했다고 답했을 정도로요. 왜일까요. 흑인들이 타고난 곱슬머리는 오랜 시간 열등하다고 여겨졌고 차별의 대상이 됐습니다. 남성에 비해 외모 평가에 더욱 자주 내몰린 흑인 여성들은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갖기 위해 독한 파마약을 쓰곤 했고, 이 약은 머리카락과 두피를 손상시켜 탈모증을 유발했습니다. 인종차별에 맞서 곱슬머리를 강조한 여성들도 있지만, 이들 또한 견인성 탈모증으로 고생하곤 했습니다. 흑인 여성들이 마주한 경제적 어려움은 이런 탈모증을 치료하기는커녕 진단받기조차 어렵게 합니다. 요컨대 흑인 여성들이 겪는 탈모증은 인종 차별과 여성 혐오라는 이중 차별이 낳은 결과입니다.

록의 농담은 흑인 여성들이 경험하는 차별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잘못됐습니다. 책 ‘나쁜 페미니스트’를 펴낸 작가 록산 게이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흑인 여성들이 온갖 모욕·인종차별·여성혐오를 참아내도록 강요받는다’고 짚었습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타요 베로 칼럼니스트는 “흑인 여성을 향한 조롱은 그들이 겪는 분투를 현실적이거나 정당한 것으로 보지 않는 코미디의 전형”이라며 “세상은 흑인 여성을 보호할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긴다”고 지적합니다. 심지어 록은 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아시아계 어린이들을 “미래의 회계사들”이라고 소개해 물의를 빚었습니다.

시상식은 끝났지만 질문은 남아야 합니다. 그 ‘국뽕’이 실제로 존재하는 차별을 외면하진 않았는지, 그 농담에 누군가는 왜 웃지 못했는지를 말입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