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없는 아이들 - 상] ‘유령 아이들’의 눈물은 언제 마를까 [흔적 없는 아이들 - 하]한국서 태어나도 주민번호 없어요 |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살 수 있는 것. 내가 나임을 인정 받는 것. 제가 원하는 건 그런 최소한의 것들이에요. 저는 한국에서 유령으로 지내온 거나 마찬가지예요.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도서 ‘있지만 없는 아이들’. 은유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미등록 이주 아동 A씨의 말이다. 작가에 따르면 그는 2020년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줄곧 살아왔지만 비자가 없던 몽골 국정 부모 아래 태어나 ‘미등록’ 상태로 자랐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살고 있음에도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인 셈이다.
국내 미등록 이주민은 30~40만명, 미등록 이주 아동은 2만명으로 추정된다. 체류 자격이 없는 외국인 부모가 낳거나 데려온 자녀로 출생 신고나 외국인 등록을 하지 못한 경우다. 이 때문에 은행은 물론 병원을 이용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주민센터 친구의 이예지 변호사는 “(미등록 이주 아동들이) 학교를 다닐 순 있지만 학교장 재량이다. 학교장이 허락해주지 않으면 다른 학교에 가야되는 것”이라며 “자신을 받아주는 공립학교를 찾을 때까지 떠돌아다녀야 한다”고 했다. 어린이집, 유치원 등은 더욱 입소하기 어렵다고.
학교 문턱을 넘으면 또 다른 차별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등록번호가 없다보니 아이들은 학교 안전공제 보험, 여행 보험 등을 들 수 없다. 친구들과 소풍 한 번 마음 편히 갈 수 없는 상황인 셈이다.
그나마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학습권이 보장돼 학교를 다닐 수 있다지만 성인이 되면 강제 퇴거 대상이다. 대학에 입학해 유학생 비자를 받거나 취업 비자를 받지 않는 이상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숨어지내야 하는 신세일 수밖에 없다. 어려운 경제 형편에, 언제 쫓겨날 지 모른다는 불안감 등으로 미래를 포기한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
한국은 지난 1991년 아동의 생존권, 발달권, 보호권, 참여권을 차별없이 보장하는 유엔아동권리협약에 서명한 비준국이다. 이주민 역사가 30년에 이르는 동안 미등록 이주 아동의 보호도 사회적 문제로 꾸준히 제기돼 왔지만 최근에서야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법무부는 인권위원회 권고로 지난해 4월, 2025년까지 적용되는 구제안을 내놨다. 국내에서 태어나 15년 이상 살거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주아동으로 구제대책 대상자를 제한했다. 이에 인권단체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일었고 법무부는 올해 1월 대상을 확대한 보완책을 내놨다.
국내에서 태어나지 않은 아동도 대상이 돼 영·유아기(6세 미만)에 입국한 경우에는 6년 이상, 영·유아기를 지나서 입국한 경우에는 7년 이상 국내 체류하며 공교육을 이수하면 체류자격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다만 이 구제안은 2025년 3월까지 한시적으로 시행한다.
지난해 구제대책보다 진일보했지만, 미등록 이주 아동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여전히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게 인권단체와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김사강 이주와 인권연구소 연구원은 “(미등록 이주 아동 부모는 구제안을 신청하려면) 범칙금을 내야 하는데 사실은 이들이 부담하기 너무 큰 큼액이다”며 “미성년자인 아동의 생계를 위해 부모들을 체류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취지였는데 그렇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 범칙금을 내라고 하면 사실상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고 했다.
예컨대 미등록 체류기간이 7년 이상 머물렀다고 하면 범칙금이 3000만원이다. 법무부가 3개월 이내에 범칙금을 내면 일괄 70%를 깎아 1인당 900만 원까지 내려주는데, 부부 합산 1800만원을 3개월 안에 내야 한다. 신분 노출을 꺼리는 미등록 노동자들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고 급여 수준도 높지 않은 경우가 많아 신청 자격이 있어도 부모에게 부과되는 거액의 범칙금 때문에 신청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이에 법무부는 아동의 체류 허가 신청 관련 실태조사에서 범칙금 납부 능력이 부족하거나, 없는 사유가 있는 경우 범칙금 감면을 적극 시행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한시적 구제대책이란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김 연구원은 “한 집에서 언니, 오빠는 구제가 되는데 동생은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며 “법무부가 체류 자격을 주겠다고 한 것은 아이들이 국내에서 교육 받으면서 언어 등 한국인에 준하는 정체성을 갖게 됐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살게 될 아이들도 마찬가지 일 것. 그래서 한시적인 것보단 상시적인 게 좋지 않나(생각한다)”고 했다.
김 연구원은 “초·중·고 교육을 하고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잘 만들어 놓고 이제 (부모 나라로) 가라고 하는 것은 사실 ‘이럴거면 교육을 왜 시켰을까’가 된다”며 “(성인이 돼 강제 추방 기로에 섰던 아이는) 벌써 서른살이 됐다. 30세~40세까지 한국에서 미등록자로 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 정말 우리 사회가 원하는 것일까. 노동 능력이 있는 이들이 계속 미등록으로 체류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임지혜 기자 jih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