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없는 아이들 - 상] ‘유령 아이들’의 눈물은 언제 마를까 [흔적 없는 아이들 - 하]한국서 태어나도 주민번호 없어요 |
#베트남에서 온 이주노동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고등학생 A양은 아이돌 B그룹의 열성팬이다. B그룹의 콘서트 소식에 공연 티켓을 예매하고 싶었지만 예매 사이트 회원 가입을 할 수 없어 포기했다. 콘서트뿐만 아니다. 공부를 잘해도, 각종 대회에서 상을 받아도 원하는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었다. 같은 반 친구로부터 괴롭힘을 당해도 미등록자인 게 알려질까 두려워 억울해도 참을 수밖에 없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나라는 존재를 인증할 수 없다는 현실에 우울감이 더 커졌다.
인권센터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가상의 인물 A양이다. A양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A양의 사례는 한국에서 살고 있음에도 법적으론 존재하지 않는 미등록 이주 아동들이 현재 겪고 있는 이야기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따르면 아동은 출생 즉시 등록될 권리를 갖고 있다. 아동 인권 보장을 위해서다. 비준국인 우리나라도 이 협약을 지켜야 하지만 이를 실행할 법이 없다.
이예지 이주민센터 친구 변호사는 “예컨대 베트남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한국에서 출산했어도) 원칙적으론 베트남 사람이므로 베트남대사관에 출생신고를 하고 여권 또는 여행확인서 등을 받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이런 업무를 이주민들이 하기가 쉽지 않다”며 “미등록 외국인 미혼모의 경우 출생확인을 하고 엄마의 본국에 가서 출생 신고와 번역 공증, 유전자 검사(친자 확인을 위해) 등을 거쳐야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 대사관이나 영사관이 없는 나라도 많은데다 과정도 복잡하다. 미등록 이주민은 체류 자격 등 신분상의 문제로 본국 정부에 자녀의 출생 신고를 하기가 어렵다보니 이들의 자녀 역시 미등록 이주 아동이 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출생신고가 안되면 주민등록번호를 받을 수 없다. 국가가 아이의 존재를 모르니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거나 보호받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 복지 사각지대에 몰린 미등록 아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보완적 제도로 ‘출생통보제’가 거론되지만 해당 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출생통보제는 대부분의 출산이 의료기관(산부인과)에서 이뤄지는 만큼 신생아가 태어난 사실을 의료기관을 비롯한 제3자가 아동의 출생 사실을 국가에 직접 알리는 제도다. 현재는 부모가 출생 한 달 내에 직접 신고를 하지 않으면 아이는 법적인 이름도, 행정 서비스도 제공받을 수 없는 무국적자가 된다.
의료계는 반대 목소리를 내왔다. 의료기관에 새로운 행정업무 부담을 지게하고, 신고 대행에 따른 책임 소재와 제도가 악용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출생통보제를 골자로 한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일부 개정안(가족관계등록법 개정)이 지난 3월 국회입법예고에 올라오자 의견 게시판에 “불법 체류자의 자녀들도 한국 국적을 갖게 되는 것” “자국민을 위한 법이 아니다” 등 반대 의견이 쏟아지기도 했다.
경기도 시흥시에서도 지난해 ‘시흥시 출생확인증 작성 및 발급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기 위해 주민청구 조례 운동을 진행했지만, 시의회는 지난 4월 상위법 위반을 이유로 각하 결정했다.
여러 이해관계가 부딪히며 아동의 출생 신고될 권리는 잊혀졌다.
미국의 경우 부모 국적과 상관없이 자국 내에서 출생한 모든 아동에게 시민권을 부여한다. 영국·독일·호주·태국도 영토 내에서 출생한 모든 아동에게 출생 등록을 법적으로 보장해 복지 사각지대를 최소화하고 있다.
이 변호사는 “한국에서 태어나 외관상으로도 한국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자랐지만 등록되지 못해 일상 생활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온라인 사이트에 회원 가입하거나 계좌이체 하는 등의 일은 (누군가에게) 사소한 것이지만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증할 수 없는 미등록 이주 아동들에겐 삶의 의욕을 잃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임지혜 기자 jih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