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전직 해상자위대 자위관 출신으로 알려진 야마가미 테츠야에게 피격,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일본 전후 최연소 총리이자 최장수 총리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 아베 전 총리는 일본 내에서 아베노믹스, 아베독트린 등 미·일 외교 및 일본 경제 부문에서 큰 변화를 일궈온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일본의 재무장 및 군비 증강, 퇴임 후에도 꾸준히 막후에서 활동하며 우경화를 조장한 정치인으로 인식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정치 엘리트’ 집안의 도련님, 최연소 일본 총리되다
아베 신조의 가문은 일본 내에서도 엘리트로 불렸다. 아베의 부친은 아베 신타로로 1980년대 일본 외무상을 역임하고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된 인물이다. 특이할 점으로 외가가 정치적으로 더 큰 성공을 이뤄냈는데,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자 현 일본의 최대정당인 자민당 체제를 확립한 기시 노부스케를 외조부로 두고 있다.
부친인 아베 신타로는 반전주의·친한파로 유명했지만, 기시 노부스케는 전통적인 일본의 보수파였다. 이같은 집안 배경이 아베 전 총리로 하여금 친한파와 반한파적인 면모가 동시에 나오게 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아베 전 총리는 1982년 아베 신타로의 비서로 정계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된다. 이후 모리나과제과 마쓰자키 아키오 회장의 딸인 마츠자키 아키에와 결혼한다. 자민당서 북한에 대한 대북 강경파로 주목받던 아베는 2006년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 당선되면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후임으로 임명된다. 당시 아베의 나이는 만 52세로, 전후 최연소 총리라는 칭호를 얻는다.
지금이야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 1기 시절 아베 전 총리는 국립현충원에 일본 총리 사상 최초로 참배하는 등의 친한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2007년 7월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역사적으로 참패하면서 바로 다음달인 8월 건강상의 문제로 총리직에서 내려온다. 건강을 핑계로 사임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많았지만, 실제로 그가 걸린 궤양성 대장염 이후에도 계속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아베노믹스’와 ‘강한 일본’으로…재기에 성공하다
1차 내각 실패 이후 아베 전 총리는 2008년 정치계에 다시 복귀한다. 이때부터 아베 전 총리는 강경한 발언을 이어가며 일본 우익의 표심을 얻는 행보를 보인다. 실제로 야스쿠니 신사에서 참배를 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한국과 중국 상대로 논란이 될 말을 이어가기 시작한게 이때부터다.
그렇게 점점 자민당 내에서 입지를 얻은 아베 전 총리는 2012년 96대 총리에 취임하면서 아베 2기 내각 체제를 완성한다. 이때 발표된 것이 바로 ‘아베노믹스’다. 아베노믹스는 ‘무제한 양적완화’를 중심으로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져있던 일본에 인플레이션을 발생,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정책을 말한다.
아베노믹스의 성패를 따지면 현재는 실패에 가깝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아베 정권 기간 닛케이 지수가 큰 폭으로 증가하고 20년 내내 겪던 마이너스 물가상승을 극복하고 1% 부근의 물가상승률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2013년 아베 내각에선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일어난 해다. 먼저 2020년 도쿄올림픽 유치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아베 전 총리의 ‘일본의 보통국가화’ 행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을 강한 나라로 만들자”…브레이크 없는 극우 행보
“침략에 대한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확실하지 않다”
“야스쿠니신사와 알링턴국립묘지, 뭐가 다른가”
앞에 두 발언은 2013년 아베 전 총리가 한 해에 한 말이다. 일본제국 731부대를 상징한다며 한·중 양국으로부터 큰 비판을 받은 ‘731번 훈련기’에 탑승한 것도 이때이며, 총리 신분으로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한 것도 2013년이다.
또한 중국을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의 묵인 아래 일본의 재무장화도 차근차근 밟기 시작했다. 2014년 4월 무기수출 3원칙을 폐지하고 평화헌법 개정 시도가 동시에 이뤄졌다.
한국에선 박근혜 정부가 집권한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를 타결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으로, 불가역적으로 종결됐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아베 전 총리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의 증거가 없다”, “이번 합의에 의해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유형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는 등의 망언을 일본 국내에서 쏟아내면서 한·일 양국의 국민감정이 크게 악화되게 만들었다.
2019년, 역대 최장기 집권 일본 총리가 된 아베 전 총리는 문재인 정부와 마찰을 빚기 시작하며 양국의 관계는 사실상 최악까지 내려갔다. 제주 국제관함식에 자위대가 욱일기를 게양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제철 강제징용 소송분쟁이 일어났으며, 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반도체 핵심소재들을 수출제한하는 ‘한·일 무역분쟁’을 야기했다.
이처럼 주변국가와 사실상 파국에 가까울 정도로 갈등을 빚던 아베 전 총리였지만, 일본 내에선 지지율이 확고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당시 아베의 자민당 총재 4선을 가능하게 하는 방안이 논의될 정도였다.
하지만 코로나19가 2020년 전 세계를 덮치면서 아베 전 총리에게도 시련이 닥쳤다.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호 사건’이나 ‘아베노마스크’ 논란 등으로 방역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급기야 아베 정권 최대 치적이던 2020년 도쿄올림픽을 1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지지율하락을 버티지 못하던 아베 전 총리는 끝내 8월28일 궤양성 대장염 재발을 사유로 총리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하지만 아베 전 총는 퇴임 이후에도 자민당 막후에서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지난해 9월 열린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도 기시다 총리가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게 아베 전 총리는 이번 참의원 선거 기간에도 자민당 선거 유세를 다니다 참극을 당했다.
김동운 기자 chobits3095@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