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걸그룹의 시대

다시, 걸그룹의 시대

기사승인 2022-09-05 06:00:02
데뷔곡 ‘어텐션’으로 주요 음원 차트 1위를 석권한 그룹 뉴진스. 어도어

뉴진스, 블랙핑크, 아이브, 소녀시대, WSG워너비…. 써클차트(옛 가온차트)가 집계한 8월4주(8월21~27일) 디지털 차트에서 상위 10위에 든 팀들이다. 디지털 음원 스트리밍과 다운로드 등을 토대로 매겨진 이 차트는 요즘 말 그대로 ‘여인천하’다. 4세대 걸그룹을 중심으로 여성 아이돌 가수들이 높은 순위를 싹쓸이하고 있어서다. “뉴진스 좋고, 르세라핌이나 아이브. 남자 아이돌은…누가 있죠?” 배우 이제훈이 웹예능 ‘튀르키예즈 온 더 블럭’에서 요즘 즐겨 듣는 음악을 열거하며 남긴 이 말은 많은 누리꾼들에게 공감을 얻으며 온라인에서 화제를 모았다.

낯선 풍경은 아니다. 2~3세대 아이돌이 전성기를 누리던 2010년대에도 음원 차트에선 보이그룹보다 걸그룹이 강세였다. 신드롬급 인기를 구가한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를 시작으로 투애니원, 씨스타, 걸스데이, 에이핑크, AOA 등 여러 걸그룹들이 활약하며 많은 유행곡을 남겼다. 보이그룹이 글로벌 팬덤을 구축하며 몸집을 키워가던 3세대 아이돌 시장에서도 여자친구, 마마무, 트와이스 등 걸그룹들은 대중적인 인지도를 토대로 음원 차트 최상위권 순위를 장악했다.

2010년대와 2020년대 걸그룹 시장의 차이는 음반 판매량에서 드러난다. 대중적 인기를 보여주는 음원 차트와 달리, 음반 차트는 팬덤의 규모와 충성도를 가늠케 하는 척도로 통한다. 보이그룹의 경우 엑소, 방탄소년단, 세븐틴, 스트레이 키즈 등이 단일 음반으로 100만장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반면 비슷한 시기 활동한 걸그룹의 음반 판매량은 30~50만장 대에 그쳤다. 보이그룹과 걸그룹 팬덤의 ‘화력’ 차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런 음반 시장 분위기가 최근 달라졌다. 블랙핑크가 2020년 발매한 정규 1집으로 밀리언셀러를 달성한 데 이어, 에스파도 지난 7월 발매한 미니 2집으로 100만장 넘는 판매량을 올렸다. 오는 16일 출시되는 블랙핑크의 새 정규음반은 선주문량(음반 소매점이 유통사에 주문하는 물량) 200만장을 돌파해 새로운 밀리언셀러가 탄생할 것으로 기대된다. 걸그룹 데뷔 음반 초동(발매 첫 주 판매량) 신기록은 지난 1년 사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 아이브, 케플러, 르세라핌, 뉴진스 등 신인 그룹들이 데뷔 초부터 탄탄한 팬덤을 모은 결과다.

그룹 블랙핑크. YG엔터테인먼트

김진우 가온차트 수석연구원은 “블랙핑크 이후 걸그룹을 보는 기획사의 관점이 달라졌다”고 짚었다. 2010년대만 하더라도 걸그룹들은 한국 활동에 주력했다. 행사 공연에서 벌어들이는 매출이 크다보니, 누구나 좋아하고 따라 부를 만한 노래를 주로 발표했다. 하지만 블랙핑크가 빌보드 메인 차트에 오르고 월드투어를 여는 등 해외에서 인기를 끌자, 이들을 역할 모델로 삼은 ‘팬덤 지향 걸그룹’이 속속 등장했다. 강렬한 음악, 화려한 퍼포먼스, 정교하고 방대한 세계관 등 보이그룹의 글로벌 성공 공식이 걸그룹에도 이식됐다. 김 수석연구원은 “블랙핑크의 성공을 본 제작사들이 K팝 주요 소비층인 여성 팬덤을 모으기 위해 걸 크러쉬 콘셉트에 몰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진로 변경은 K팝 팬덤의 팽창과 화학 작용을 일으키며 걸그룹 활동 반경을 전 세계로 넓혔다. 트와이스는 지난 2~5월 미국 5개 도시에서 9차례 공연하며 15만여 관객을 불러 모았다. K팝 걸그룹 최초로 미국 스타디움 공연장(관객 5~7만명 규모)에도 입성했다. 같은 소속사 후배 그룹인 있지도 데뷔 첫 월드투어를 지난 달 시작했다. 블랙핑크는 다음 달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아시아, 북미, 유럽 등, 오세아니아 등 세계 전역을 돌며 공연한다.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는 “아레나(관객 1~3만명 규모)뿐 아닌 스타디움 투어를 기획했다”면서 “약 150만 관객 동원을 예상한다”고 말했다.

김 수석 연구원은 “전체 K팝 음반 판매량에서 구보(옛 음반) 판매량의 비중이 과거 6~8%에서 최근 12~14%로 높아졌다. 해외에서 신규 팬덤이 꾸준히 유입된다는 의미”라면서 “걸그룹 음반 판매량 증가도 K팝 팬덤 확장으로 인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이어 “결국 걸그룹 제작도 ‘팬덤 비즈니스’에 집중하는 보이그룹과 비슷하게 흐를 것”이라면서 “씨스타, 에이핑크처럼 대중적인 음악을 내는 걸그룹은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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