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神道) 굿판 벌인 일제의 총독부·총독 관저 이전 행사

신도(神道) 굿판 벌인 일제의 총독부·총독 관저 이전 행사

[MZ세대를 위한 '현대문으로 읽는 근대뉴스' 해설]
총독부 관저는 미 군정청장 관저, 경무대·청와대로 이어져

기사승인 2022-10-24 12:10:10
1926년 10월 2일 

676만원의 거액으로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낙성식이 1일 신청사내에서 거행됐다. 이날 낙성식에는 민관 1560명이 참석했다.

낙성식은 오전 10시 새로 단장한 대(大) 홀에서 참석자 전원이 착석한 후 ‘가미(神)가 내리기를 바라는 예’ ‘신에 헌찬(獻饌)’ ‘축사복상(祝辭奉上)’ 청사 준공을 수발한 총독 이하 ‘신도 봉헌의 예’ ‘제사 상 물림의 예’ ‘천황 신께 드리는 공사 보고’를 한 후 총독의 인사말과 내빈의 축사로 이어진 후 폐막됐다. (출처 동아일보)

개방 5개월째를 맞는 청와대. 관광에 나선 가족이 청와대 본관 앞에서 기념 사진을찍고 있다. 사진=국민일보 최현규 기자

□ 해설

1926년 10월. 지금의 광화문 후면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완공됐다. 착공식 8년 만에 완공식을 한 것인데 그 절차가 철저히 일본 신도(神道) 의식을 따랐다. ‘신’은 일본말 ‘가미’이고 이 가미는 곧 천황이다.

이 조선총독부는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의 관제’가 공포되어 다음 날인 10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의 기능이 가동됐다. 우리로서는 나라를 잃은 것이다. 초대 총독으로는 앞서 조선통감부(일본의 조선에 대한 준 식민통치 기관) 통감으로 있던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취임했다.

1922년 12월 14일자 조선일보는 건축 중인 조선총독부 청사가 ‘동양 제일의 규모이며 완공 후에는 총독부 내 각 국부가 신청사로 이전하며 부근 지역 상권이 적잖이 발전할 것이라 본다’고 보도했다.

어찌됐든 일제는 1926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이전과 신청사 완공으로 ‘광화문시대’를 열었다. 그 낙성식에서 철저히 신도 종교 의식에 따라 우리 땅, 그것도 조선의 심장 경복궁에서 강신의 굿을 벌리고 귀신들에게 제삿밥을 바친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청사 사진. 청사 뒤편으로 총독 관저가 마련됐고 이 관저가 미 군정청장 관저, 이승만 관저 경무대에 이어 '청와대'가 됐다.  

더하여 ‘옥곶(玉串)의 예’, 즉 천황에게 최대의 낮은 자세로 봉존(奉尊)하는 의식을 벌였으니 한국사 오천년에 이 같은 수치가 없었다. 이 조선총독부 건물은 해방 후 미 군정청과 중앙청으로 활용되다가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철거됐다.

그 총독부의 총독 관저가 현 청와대 본관의 시발점이었다. 총독 관저는 해방 후 미군청장 관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 ‘경무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청와대라는 명칭은 1960년 4·19혁명 후 사용됐다.

그렇게 근·현대사의 심장 역할을 해온 청와대가 지난 5월 10일 74년 만에 ‘대통령실 용산 이전’과 함께 개방됐다. 정부가 발표한 ‘74년 만의 개방’이다. 하지만 일제가 총독부 관저로 쓰기 시작한 이전부터도 개방된 적이 없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는 ‘조선 왕조의 경복궁 청와대 터 첫 일반 개방’이라고 해야 한다.

다른 의미로는 ‘총독부·미 군정청·대한민국 수장 관저 첫 개방’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영욕의 공간 ‘청와대’인 것은 확실하다.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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