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과 한통속 무당, 서양 구제 의사 돌팔매로 내쫓고 푸닥거리

수령과 한통속 무당, 서양 구제 의사 돌팔매로 내쫓고 푸닥거리

[근대 인술의 현장(5)] 전북 군산 '째보선창'과 호남 첫 의사 드루(상)
동학농민전쟁 현장에 뛰어들어 조선 민중 치료에 헌신...

기사승인 2022-10-26 09:07:41
1894년 2월 10일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 등이 봉기하여 고부(현 전북 정읍시 고부면 일원) 관아를 습격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농민군이 내건 기치는 ‘척왜척양 보국안민’이었다. ‘왜놈과 양놈을 물리치고 나라와 백성을 구한다’.

그해 3월 고부에서 북서쪽 200리(80km) 지점 군산포에 조선 돛배를 타고 서양인 두 명이 하선한다. ‘척양’의 기치가 들불처럼 번지던 때였다. 이 서양인은 미국인 의사 알렉산드로 드루(1859~1926)와 의료사역자 윌리엄 매클레이 전킨(1865~1908)이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선 민중의 구제에 앞장 섰던 미국 의사 알렉산드로 드루(1859~1926)

이들은 1894~1895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임에도 가난과 병마에 신음하는 조선의 민중을 구제하겠다고 세 달여의 항해 끝에 입국했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당시 군산은 개항 전이라 전북 옥구군 북면에 속했다. 드루(한국명 유대모)는 버지니아주 햄던-시드니대학과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하고, 버지니아의대를 졸업한 인재였다. 이런 그가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예수의 박애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이름도 모르는 땅 ‘조선’, 그것도 당시 제물포에서 3일간 항해 끝에 닿을 수 있는 군산에 내려 호남 땅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됐다. 전킨(전위렴) 또한 선교적 사명 하나로 기꺼이 드루와 동행했다.

두 사람은 1885년 조선에 온 언더우드(1859~1916·연세대 설립자)가 미국 순회를 하며 극동 조선의 비참한 민중의 현실을 전하고 구제를 호소하자 이에 응한 것이다.
군산 '째보선창' 일원. 1894년 조선 백성이 병마와 가난에 고통을 당하자 미국 의사 드루 등이 제물포를 거쳐 3일 만에 이곳에 닿았다. 드루는 호남 첫 서양 의사였다. 사진=서종표

드루는 어딜 가나 수술용 칼과 알약 몇 종류를 메고 다녔다. 그러나 누구도 그 서양 의사에 아픈 몸을 맡기지 않았다. 그해 조선 땅 어디나 콜레라가 대유행이었고 근대 의학 개념의 ‘호열자(콜레라)예방규칙’이 반포됐으나 무지했던 백성은 굿에 의존했다.

“유 의사 대인께 아룁니다. …중한 병신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거룩한 성약을 주시고 긍휼히 불쌍하게 생각해 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순회 진료 과정에서 만난 천주교인 등 깨인 사람들만이 드루로부터 치료를 받고 위와 같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들이 호남 지방을 순회 진료할 때 조선의 방역 체계는 전무한 상태였다. 인천 평양 의주에 검역소와 피병원(공공병원) 막 설치될 때였고 의료 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드루와 같이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의사들을 고용하는 것뿐이었다.

‘다행인 것은 입소문을 타고 우리의 위생 조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겁니다. 우리는 스테이션(군산 수덕산 아래)에서 매일 아침 9시 진료소(초기 구암병원)를 운영합니다. 금강을 따라 위로는 강경까지, 서해안으로는 고군산열도까지 순회 진료를 나갑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의약품이 떨어져 애를 먹고 있습니다.’(‘선교 보고’ 중)
서양 의사와 선교사들이 군산에 도착해 구제 진료소를 열었던 초가. 지금의 군산 수덕공원(당시 수덕산) 자락이었다. 1895~1900년 사진으로 추정. 

환자들은 드루의 인술에 감사해 굴, 달걀, 미역, 생선 등을 내밀었다. 그들의 맑은 영혼에 ‘호남 미션’의 책임자 전킨은 군산에 선교부를 세울 준비를 했다. 드루가 환자 진료에 몰두할 때 전킨은 병원과 학교, 예배당 대지를 물색하고 다녔다.

또한 드루와 전킨은 의료와 복음 사역을 위해 군산 전주 정읍 흥덕 줄포 곰소 등과 영광 무안 목포 해남 진도 고흥 벌교 등을 순회했다. 미국남장로회가 이들의 구제 활동을 위한 답사를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이들의 선교 보고에 따라 미국 어린이들도 저금통을 깨 조선의 불쌍한 어린이를 돕겠다고 나섰다.

“날 음식을 그냥 먹지 말고 끓여 드시고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과 얼굴을 씻으십시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은 나쁜 세균이라는 것이 있어 이 때문에 호열자에 감염됩니다.”

드루는 가는 곳마다 이렇게 설파했다. 그러나 관아 소속 무당과 한의들이 그들을 양귀(洋鬼)라며 배척했다. 수령들은 전염병이 돌면 무당들을 시켜 푸닥거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제수굿을 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었고 그 비용은 양민에 부과했다. 드루 일행이 "미신에 의지하지 말고 위생을 깨끗이 해야 한다"고 말하자 무당과 성난 민중은 그들에게 돌을 던져 마을 밖으로 내쫓았다.  전염병으로 죽으면 거적대기에 싸 숲 속에 버렸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이들도 그렇게 버려졌다. 
의사 드루 일행이 찍은 19세기 말 군산 일대 장례문화 모습. 아이가 죽으면 시신을 짚으로 싸매 높은 나무에 매달아 놨다.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유골만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순회 활동 중 조선 주재 미국 영사가 급전을 띄웠다. 호남과 충청 지방에 농학농민혁명의 후폭풍이 드세니 철수하라는 전갈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드루가 순회 일정을 소화하느라 발이 퉁퉁 부어 지속할 형편이 못됐다. 이들은 여수(추정)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 한양으로 되돌아왔다.

드루와 전킨 일행이 두 달여 만에 한양 서소문에 나타나자 “그 척양의 난리(동학농민봉기) 속에 살아 돌아온 건 기적”이라고 놀라워했다.

한편 동학농민군은 드루 등 서양 의사와 교육자, 선교사 등이 조선인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농민군 군영에 척양을 삭제하고 ‘진멸왜이(殄滅倭夷)’ 깃발만 달도록 했다. 호남 지방 첫 서양인 드루와 전킨 일행의 순회 진료는 동학농민운동과 접점을 이루면서 ‘서양 이미지’ 제고에 큰 역할을 했다. <계속>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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