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을 사흘 앞둔 12월29일 오전 6시께 강원 평창군 대관령마루길. 대관령마을휴게소에서 선자령 쪽으로 향하는 산길을 사륜구동 취재 차량이 거슬러 올라갔다. 상향등으로 앞을 밝혔다. 눈 덮인 산길과 검은 하늘이 선명히 구분됐다. 숲속에서 호랑이가 튀어나와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깊은 산중.
새벽 여명 속에서 20여분 나아가자 목적지인 한국공항공사 강원항공무선표지소가 나타났다. 정문에서 어둠보다 짙은 색 개 한 마리가 달려 나왔다. 철문에 가로막혀 달려들지는 못했지만 15kg은 될 법한 덩치가 위협적이었다. 낯선 사람의 접근을 눈치 채고 짖었다. 경비직원이 "물지는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 개가 강원항공무선표지소의 1차 파수꾼임은 분명해 보였다.
이날 찾은 강원항공무선표지소는 지난 1973년 해발 1049m에 세워진 국내 최초 항행안전시설이다. 민항기와 군용기 조종사들은 표지소에서 쏴주는 전파신호를 받아 위치를 확인하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운항한다. 하루 평균 300여대가 이 표시소의 신호에 의지해 하늘 길을 나아간다. 그래서 미주, 중국·일본, 포항 3개 항로를 이용하는 항공기들에게는 '하늘길 등대'같은 존재.
야간 당직근무를 마무리 짓고 있던 허정욱(57) 차장이 취재진을 맞았다. 간밤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듯 한 얼굴이었지만 30년 넘게 항공통신분야에 종사한 베테랑답게 시설 현황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2중 바리케이트로 둘러싸인 4000여 평 공간에 1층짜리 콘크리트 건물군과 전방향표지시설(VOR), 전술항행표지시설(TACAN), 조종사와 관제사간 교신을 중계하는 항공이동통신시설(A/G) 등의 시설이 들어섰다.
표지소는 선자령 비박을 즐기려 산을 타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눈길을 받을 만한 외관을 가졌다. 전체 면적 중 4분의 1이상을 차지하는 전파발사대 덕이다. 산등성이에서 이 시설을 발견한 사람들은 중앙에 안테나를 뾰족하게 세운 거대한 비행접시를 선뜻 떠올릴 듯 했다.
해돋이를 촬영하기 위해 오전 7시30분께 허 차장의 안내로 전파발사대에 올라갔다. 수은주는 영하 12도를 가리키고 있는데 체감온도는 두 배 더 낮았다. 바람이 채찍처럼 뺨을 후려갈겼다. 수도권에 불어온 겨울바람이 대관령에서 상승기류를 타고 올라 한층 더 차가워진 듯했다.
올해로 9년째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허 차장은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좋다"고 말했다. 11~12월은 서풍이, 1~3월은 동풍이 거세게 분다고 한다. 산중이라 겨울이면 영하 20도는 일상이란다. 지난해에는 눈보라가 거세 사흘 동안 표지소에 고립된 적도 있다고 했다.
전파발사대 계단에서 후면을 살피니 횡계리 쪽 산허리에 늘어선 풍력 발전기들이 눈에 담겼다. 백두대간과 동해바다가 정면 풍경을 양분했다. 인구 21만 명의 강릉시는 그 사이에서 소읍처럼 보였다.
날이 밝아오자 표지소 운영을 책임지는 노충남(54) 소장과 신민철(52) 차장, 그리고 막내격인 송환우(34) 과장이 일제히 출근했다. 허 차장과 바통터치를 한 뒤 곧바로 업무에 들어갔다. 오전 10시께 슈퍼컴퓨터 같은 모양의 항공이동통신시설 스피커에서는 조종사와 관제사가 주고받는 교신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영어와 전문용어가 섞여있어 알아듣기 어려웠다. 직원들은 감청하듯 그저 듣기만 하고 개입하지 않았다. 같은 시각 표지소를 중심으로 40여대의 항공기가 항로를 따라 이동하는 게 컴퓨터 그래픽 화면을 통해 확인됐다.
표지소 근무에서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끼니를 직접 해결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지이다 보니 밥 해줄 사람을 따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직원 대부분이 요리하고는 담을 쌓은 듯 한 중년남성이기에 어려움이 더할 듯 싶었다. 신 차장이 1등 요리사라고 자부한다지만 말라비틀어진 고추장을 냉장고 안에서 확인하자 뭔가 짠한 마음이 들었다. 점심시간, 취재진이 갖고 온 식재료로 닭볶음탕과 굴전을 만들어 식탁에 올려놓자 직원들은 반찬투정 없이 밥한공기를 깨끗하게 비웠다.
이날 점심식사를 마친 오후 1시께 기온은 영하 5도로 올라갔다. 그래도 서풍이 거센지라 체감온도는 영하 11도. 노 소장과 송 과장은 자동차 배터리만한 크기의 통신전파 측정기를 들고 표지소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인근 봉우리로 향했다.
천안에 근무했던 노 소장은 최근 강원도 오지로 발령 나자 지인들로부터 위로전화(?)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가족들과 떨어져 졸지에 '독거중년' 신세가 됐지만 "하늘 길의 안전을 지킨다는 자부심을 갖고왔다"고 말했다.
연말에는 뜻밖의 선물을 받는단다. 강원항공무선표지소가 항행안전시절 종합관리 우수부서로 선정돼 한국공항공사 윤형중 사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는다고 했다. 2년 전에도 안전관리활동 우수부서로 선정됐다. 축하의 말을 전하자 "전임 하용진 소장님과 직원들이 이뤄놓은 성과"라고 말했다.
봉우리 전망대에 안테나를 세우고 전파가 고르게 잘 퍼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표지소 근무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1년 전까지만해도 김해공항에서 일했다는 송 과장은 능숙하게 기기를 조작했다. "군대에서 레이더병이라도 했느냐"는 농담에 "헌병을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자신도 "이런 일을 하게 될 줄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신혼 2년차인 그는 평생 보금자리였던 부산을 떠나 올해 거처를 강릉으로 옮겼다. 학원강사였던 아내가 일을 그만두고 남편을 따라왔다.
대관령 겨울바람은 유독 차갑고 거세기로 유명하다. 낮동안 잠잠하던 바람은 이날 오후 4시께 다시 거세졌다. 전파발사대가 걱정됐다.
2년 전에는 부산항공무선표지소에서 근무했다는 신 차장은 "강원항공무선표지소만해도 동풍 아니면 서풍이 한 방향으로만 불어 시설물이 무너진 일은 없다"면서 "반면 부산은 태풍이 오면 좌우로 바람이 불어 타칸(TACAN) 안테나가 흔들린다. 통째로 떨어져 나가 이틀밤을 꼬박 새우면서 고친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홀로 밤을 지새다보면 무서운 생각이 들진 않을까.
신 차장이 대뜸 독사 얘기를 꺼냈다.
그는 "날씨가 추워지면 뱀들이 산 정상으로 이동해 동면에 들어간다"며 "지난해 가을에는 혼자 사무실에서 당직근무를 서다 등골이 서늘한 기분에 고개를 돌려보니 허 차장의 빈 의자 뒤에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튼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책상 위로 껑충 뛰어올라가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한다. 정문 경비직원이 급히 올라와 잡고보니 까치살모사였다고. 어느 구멍으로 들어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독사가 하도 많아 아예 천적인 닭 10마리를 사 풀어뒀다고 이 '부산사나이'는 털어놓았다.
송 과장은 눈길이 무섭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부산은 눈이 와도 쌓이질 않는 곳인데 이곳은 시멘트길이어서 눈이 쌓이면 그대로 빙판길이 된다"며 "표지소 전용 제설차가 치운다고 해도 길이 미끄러워 자동차가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뻔 한 게 한두번이 아니다"고 말했다.
멧돼지도 두렵다. 밤이면 음식 냄새를 맡은 멧돼지가 바리케이트를 비집고 들어오려고 용쓰는 소리가 들린단다.
표지소는 90년 말까지만해도 중요 국가시설로 지정돼 실탄이 든 소총을 들고 보초를 서야했던 곳이다. 신 차장에 따르면 직원들이 정기적으로 사격훈련까지 했다고 한다. 요새는 등산객이 많이 오가다보니 민간인이 침입하는 돌발상황도 대비해야 한다.
경비인력을 제외하고 주간 3명, 야간 1명이 4조2교대로 일하는 근무가 극한직업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시설 유지관리와 보수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필수적인 일임에는 분명해 보였다. 항공업계 특성상 작은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참사로 이어지는 것을 우리는 지켜봐왔다. 하늘길 등대가 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날 오후 6시까지 하루 표지소를 오가다 마주친 등산객 중 이곳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충주에서 온 70대 부부, 인천에서 온 60대 여성, 50대 강릉 토박이 남성도 이 곳의 역할을 모른다고 말했다. 휴게소가 아닌가 싶어 커피 사 마시겠다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조차 있었다.
대관령 외에도 전국에는 아홉곳의 표지소가 더 있다. 2023년 계묘년, 어느 깊은 산중에서 비행접시 모양의 구조물을 발견한다면 하늘길 안전을 지키기 위해 고생하는 이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 줄 일이다.
손대선 기자 sds1105@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