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마산이 본 5·18…“군부 독재 맞선 광주의 열망, 큰 빚 졌다” [5·18 43주년]

부산·마산이 본 5·18…“군부 독재 맞선 광주의 열망, 큰 빚 졌다” [5·18 43주년]

차성환 전 부마항쟁 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 인터뷰
“5·18 때 부마 민주화 열기 컸으나 ‘결집’ 못 이뤄”
“신군부, ‘유언비어’ 광주·부산 지역 갈등 조장”
“尹, 부마항쟁 기념식 참석 바라”

기사승인 2023-05-17 06:00:37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진.  5·18기념재단

“5·18 민주화운동이 다른 곳도 아닌 광주에서 일어난 것은 전남대 학생들과 광주시민의 민주화 열망이 더욱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5·18에 큰 빚을 졌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34주년 기념식을 며칠 앞둔 15일 쿠키뉴스와 특별 인터뷰를 진행한 차성환 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의 설명이다. 그는 1979년 10월 26일부터 이듬해 5월 17일까지를 일컫는 ‘서울의 봄’ 당시의 전국적인 민주화 열망의 분위기를 전하며 광주가 다른 지역과 달랐던 점은 젊은 대학생들의 적극성이라고 강조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시내 30개 대학교 10만명의 대학생들이 서울역 앞에 모여 신군부의 퇴진을 외쳤지만, 결국 회군해버리면서 신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에서 신군부의 반격에 다시 시위에 나서자는 약속을 지킨 곳은 전남대가 유일했고 이에 응한 광주시민의 진심까지 더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부마항쟁과 5.18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걸음에 크 헌신했다고도 설명했다. 

차 전 상임위원은 지난 2015년 수년에 걸친 취재와 연구를 통해 완성한 논문을 발표했다. ‘5.18항쟁과 부산의 민주화운동’라는 제목의 논문에는 5·18 이후 부산과 마산에서 5·18 사태를 바라본 이들의 생각들을 정리해 담았다. 

“전시가 아닌 평시 대낮 도심 한복판에서 군이 민간인들을 향해 발포를 자행했다는 사실을 결코 믿을 수 없었다”는 현실의 증언부터 부산의 민주화운동가들이 계엄군의 발표를 믿지 않고, 5월 광주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왔던 정황, 민중의 의식 속에 흐르던 민주화의 열기를 끊임없이 이어 나가면서 결국 6월 항쟁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는 믿음까지 그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아픔을 전해 들은 연구자이자 민주화의 산증인으로 5·18 43주년을 마주하고 있었다. 

15일 진행한 화상 인터뷰 모습.   사진=황인성 기자

다음은 차 전 상임위원과의 일문일답.

-지난 2015년 발표 논문에서 부마항쟁과 5·18의 밀접성을 언급했다. 두 사건의 관계는 
▷부마항쟁과 5.18은 군부 독재를 반대하고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점에서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운동이다. 유신체제는 부마항쟁이나 5.18항쟁 같은 대중저항이 아니고는 붕괴되기 어려웠다. 부마 항쟁은 박정희 유신 독재에 직접적으로 맞닥뜨려서 붕괴시킨 사건으로 10·26 사태를 촉발했다. 학계의 다른 인식이 있으나 부마 항쟁이 있었기에 10·26 사태가 있었다. 어떤 역사서는 부마항쟁을 10·26 이전 하나의 전사(前史)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잘못된 관점이다. 10·26 이후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가득한 가운데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가 다시 군의 실권을 잡고 실질적으로는 군부 독재를 연장하는 모습에 저항한 것이 5.18이다. 엄청난 저항과 희생 덕분에 그 이후 우리 역사에서 민주화를 추동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됐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5.18에 엄청나게 큰 빚을 지고 있다.

-5·18은 광주서 일어났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부산·마산에서도 일어났을 수 있다고 보는가
▷당시 광주와 부산 대학가의 상황이 달랐다. 당시 대규모 시위 패턴은 조직 대오를 갖춘 학생들이 먼저 시내로 나와 시위해 열기를 만들고, 이에 동조하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패턴이었다. 불행히도 부산의 학생운동의 중심이던 부산대의 학생운동세력은 그해 봄 학생들을 장악하지 못했다. 학생회장 후보 난립 속에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운동권 후보가 낙선해 5.17 쿠데타가 나기 전까지 교문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반면 광주는 달랐다. 전남대는 운동권 후보가 바로 학생회장이 되면서 빠르게 움직였다, 신군부의 반격에 맞서자는 약속대로 5월 17일 200명의 학생이 정문 앞에 모여 시위했고, 시민들과 함께하고자 광주 시내로 나갔다. 시민들의 호응도 중요했는데 광주시민의 호응은 상당히 좋았다. 

언론을 장악한 신군부의 심리전도 영향을 줬다. 신군부는 학생이나 시민들이 데모에 나서면 북한이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식으로 전쟁 위기를 고조시켰다. 수도권은 광주에 비하면 훨씬 휴전선에 가깝기도 해 심리전이 더 잘 먹힐 수 있는 그런 조건이었다. 

-2015년 발표한 논문은 주로 어떤 내용인가
▷부산·마산 사람들이 5·18 이후 5·18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주목해 설명했다. 5·18은 6·25 한국전쟁 이후에 군이 민간인을 향해서 직접 발포한 충격적인 일이었기에 당시 일반인들은 그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통신 수단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었고 텔레비전에 의존했던 만큼 일방적인 계엄군의 입장만 받아들였다. 광주 사태를 겪은 이들의 전언이나 외신 등을 통해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극을 전해 듣고서도 대부분은 믿지 않았다. 아무리 무자비한 신군부라고 해도 군인이 비무장한 민간인을 데모했다고 살상을 한다는 게 과연 있을 수 있는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취재를 통해 확인한 것은 부산·마산 운동권 세력들은 계엄군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사실까지는 다 알지는 못하지만, 민간인을 향한 군의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됐을 것이란 확신을 갖는 이는 점차 늘어났다. 또 이는 5·18 이후 부산·마산의 민주화 흐름에 적잖은 영향을 줬다. 부산에서 발생한 부림사건, 부미방 사건들은 직접은 아니지만 5·18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논문에서 지역의 여러 사례를 소개했다. 기억이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일반시민들이 5·18의 구체적인 양상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민주화운동세력은 5·18의 진실을 담은 책자나 비디오테이프 등을 통해 먼저 알고 있었지만, 대다수의 일반인은 1987년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1987년 5월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5·18 항쟁의 사진전이 최초로 열렸다. 부산 지역 신부님들과 관계자들이 노력해서 모은 5·18 관련 사진들을 전시한 것인데 매일 새벽 일찍 문을 여는 한 자갈치 시장의 아주머니가 사진전을 보겠다면 새벽 일찍 전시를 열어달라고 해 봤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사진들을 보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일반 시민의 시선에서는 적잖은 충격이던 것이다. 사진전을 보기 위해 구름떼처럼 인파가 몰려와 장사진을 쳤다. 사진전이 논란이 되자 부산 경찰 등 당시 부산의 정보기관 간부들이 자신들도 전시를 한 번 보겠다고 요청해 신부님이 보여줬다. 사진전을 보고 그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했네’라고 했다고 한다.

-신군부가 지역 갈등을 이용했다고도 말했는데 어떤 내용인가
▷전두환 일파를 신군부라고 부르는데 그들이 자행한 행태를 보면 그마저도 부르기 아깝다. 신군부는 부마항쟁과 5·18 항쟁으로 상징되는 부산과 광주 두 도시를 갈라놓은 지역주의 전략을 전개했다. 다수의 증언에서 이러한 정황을 확인했다. 부마 항쟁 때 계엄군이 부산에 들어왔을 때 ‘전라도 군인들이 부산에 와서 부산시민들을 마구잡이로 패고 폭력을 저지른다’는 식의 유언비어들이 돌았다. 믿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사람이다 보니 소문에 솔깃하게 되고 어느 순간 믿게 된다. 반대로 5.18 항쟁이 일어났을 때는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소문의 성격상 실체를 밝힌다는 게 참 어려운데 그 시기에 그런 이야기들이 시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결국 두 지역을 갈라 적대하게 만든 것은 신군부의 전략이었고 이는 6월항쟁 이후에 대선까지 이어졌다. 그럼에도 5·18 때 광주와 부산의 운동가들은 지역주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았고 함께 싸웠다는 점을 알아주면 좋겠다.

-2019년 부마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 진상조사위 활동도 전개 중이다 
▷‘부마민주항쟁진상 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이하 부마항쟁 진상조사위)’는 박근혜 정부 때 만들어졌다. 육영수 여사가 죽은 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했기에 그에게도 유신의 책임이 있다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2012년 대선 때 부산·마산 표심을 얻기 위해 부마항쟁 진상 규명을 약속했고, 당선 이후 피해자 보상을 위한 법을 만들었다. 2014년 10월 조사위가 출범했다. 당시 실무위원으로 활동했는데 박근혜 정부 동안 진상 규명 활동은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와서 2019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재단도 만들어졌다. 나는 2018년부터 2022년 초까지 상임위원으로 일했다. 부마항쟁 진상조사위가 할 일이 여전히 많다. 하지만 이번 정부로 바뀌고 지원이 충분히 잘 안되는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의 부마항쟁 기념식 참석을 바란다고
▷부마항쟁 당시 부산·마산을 통틀어 연행된 사람들 숫자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1563명이다. 일부 훈방된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구속되고 피해를 받았다. 실제로는 그보다 많을 것이다. 진상조사위는 여러 경로를 통해 피해 보상 노력에 나서고 있는데 실제로 피해를 받고도 신청을 꺼리는 분이 많다. 4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이고 밝힌다고 해 불이익이 없는데 불이익이 두려워 신청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또 문재인 정부 때 위원회가 만들어졌다고 잘못 알고 응하지 않기도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을 싫어하니까 문 정부에서 만든 진상조사위에 응하지 못하겠다는 식이다. 40년 전 일어난 국가 권력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인데 정치적인 관점으로 본다는 게 참으로 비극이다. 
윤 대통령이 부마항쟁 기념식에 참석해 격려사를 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난해에는 윤 대통령뿐 아니라 총리도 오지 않았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만 잠깐 들렸다. 

황인성 기자 his1104@kukinews.com

황인성 기자
his1104@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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