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가 가장 긴 시간을 보낸 곳이자, 왕들이 가장 사랑했던 창덕궁의 밤이 열렸다.
올해 14번째인 ‘창덕궁 달빛기행’은 청사초롱을 들고 창덕궁 달밤을 거니는 야간기행이다. 100분 동안 평소 공개하지 않는 공간과 동선으로 창덕궁 후원까지 다녀오는 프로그램이다. 서울 4대 궁에서 열리는 수많은 야행(夜行) 행사 중 가장 인기가 많다. 30초면 매진될 정도로 예매 경쟁이 치열해 궁케팅(궁궐+티켓팅), 피케팅(피 터지도록 힘든 티켓팅)으로 유명하다.
이번 창덕궁 달빛기행은 다양한 관람객에게 참여 기회를 주기 위해 예매 방식을 바꿨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와 한국문화재재단은 기존 선착순에서 추첨으로 티켓 예매 방식을 변경했다. 그 결과 정원 3600명인 이번 창덕궁 달빛기행에 4만5000여명이 몰렸다. 125대 1의 경쟁률이었다.
지난 6일 오후 7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에 도착한 순간, 인기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불 켜진 인정전과 하늘로 뻗은 처마 곡선이 밤하늘을 장식했다. 버선코를 닮은 처마 위에 나란히 줄지어 있는 토우가 어둠 속에서 더 도드라졌다.
계단을 내려가 인정전 앞마당의 박석을 걸었다. “어두워지면 감각을 더 잘 느낄 수 있다”는 해설사의 말처럼 울퉁불퉁한 박석의 느낌이 그대로 몸에 전해졌다.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로 쓰인 낙선재에선 창호지로 새어나오는 불빛과 다채로운 문살이 눈에 띄었다.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긴 조선과 닮아 보였다.
평소 개방하지 않는 낙선재 뒤편 후원도 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걷는 관람객을 고려해, 낙선재 후원으로 가는 계단 곳곳에 관복을 입은 관계자들이 발밑에 조명을 비춰줬다. 낙선재 후원에 오르면 시원한 곳에 오르다는 뜻의 육각형 누각 상량정이 보인다. 상량정에 오르니 9월 늦더위에도 이름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시원한 밤공기 속으로 대금 연주가 밀려들어왔다. 청아한 대금연주를 들으며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니, 수백년 전 어느 조선의 왕은 이곳에 서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연주가 끝난 후에도, 청사초롱으로 불 밝힌 창덕궁에 잠시 머문 대금 소리의 여운이 길게 남았다.
청사초롱을 들고 후원을 걷다보면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를 찾게 되는 공간이 등장한다. 영화당에서 들리는 아쟁연주를 들으며, 정조의 어필이 있는 주합루로 이동하면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사극 속 한 장면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부용지(창덕궁 후원의 연못)에 비친 주합루 야경에선 한낮엔 몰랐던 웅장함이 느껴졌다. 불로문을 지나 왼쪽을 보면 효명세자가 서재로 지은 의두합에 불이 들어와 있다. 불빛 사이로 독서 중인 효명세자의 그림자가 보인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와 한국문화재재단이 주최하는 창덕궁 달빛기행은 지난 7일부터 다음달 22일까지 매주 목~일요일 진행된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은 다음달 19~22일까지다. 참가인원은 하루 150명, 참가비는 1인 3만원이다.
유민지 기자 mj@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