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하면 바보” 청년의 입에서 사과가 사라졌다

“‘미안해’하면 바보” 청년의 입에서 사과가 사라졌다

기사승인 2023-10-26 06:00:25
그래픽. 이승렬 디자이너

#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모(24)씨는 스스로 불친절하다고 느낀다. 고객에게 사과해야 할 상황에도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다. 카페에서 팔지 않는 쌍화탕을 찾는 손님에게 “못 만들어 죄송하다”고 사과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였다. 그러나 마음을 담은 사과에 돌아오는 것은 충격적인 욕설이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이씨는 점점 사과하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요즘 청년들에게 “죄송합니다”는 쉽지만 가장 어려운 말이라고 한다. ‘사과’ 표현은 과거부터 수많은 관계 문제를 해결하고 유지하는 언어로 쓰였다. 잘못하거나, 잘못하지 않았어도 예의상, 분위기상 ‘사과 아닌 사과’를 건넨다. 도움을 청할 때도 “죄송한데”라며 말문을 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점점 ‘사과’가 사라지고 있다. 청년들에게 더 많은 책임을 갖게 하는 불리한 언어가 되면서다.

청년들은 사과를 안 하면 욕먹고, 사과하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진석(27·취업준비생)씨는 “사과하면 나에게 욕을 해도 된다고, 마치 면죄부를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사과한 이후 내 잘못보다 과하게 욕을 먹거나, 하지 않은 일까지 한꺼번에 공격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반복해서 겪다 보니 사과할 때 마음을 다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죄송합니다” 라는 말이 어려운 이유’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화제가 됐다. “죄송하다”고 사과하지 않으면 “그냥 죄송하다고 하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어렵냐” “뭔 핑계가 그렇게 많냐” 등 비난을 받는다고 글쓴이는 말했다. 하지만 사과를 해도 상황은 비슷하다. “뭐가 죄송하냐” “알면 안 그랬어야지. 왜 그랬어”란 말로 또 욕을 먹는다고 한다. 어떤 정답지를 선택해도 사과한 당사자만 손해를 보는 상황이니 ‘차라리 사과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이다. 해당 글에 누리꾼들은 “죄송하다고 한 순간, 모든 것을 내가 다 뒤집어써야 한다” “현대사회에선 잘 사과하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사과하지 않는 뻔뻔함도 필요하다” “죄송하다고 하면 한없이 불리해진다”며 공감했다. 

서울 시내 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직원이 일을 하고 있다. 임형택 기자

잘못하지 않은 상황에서 분위기상 떠밀려 사과하는 것이 예의인 것처럼 조장하는 사회 분위기는 더욱 사과와 멀어지게 했다. 대학생 김모(24)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죄송하다’는 말을 아끼게 된다”며 “내가 하지 않은 일까지 책임을 물어야 하는 상황이 생길까 봐 두렵다”고 했다. 이모(26·회사원)씨는 “내가 잘못한 상황에선 당연히 사과를 해야 한다”면서도 “다만 서로 간의 의견차이거나, 내 잘못이 아닌 경우에도 사과해야 하는 상황이 생겨 답답하다”고 말했다. 

사과를 꺼리는 경향이 반복되면, 정작 사과가 필요한 순간에도 진정한 사과를 하지 못하는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심화하고 고립될 수 있는 셈이다. 한 포털사이트의 상담 플랫폼에도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할 수가 없다’ ‘사과하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등의 고민이 올라온다. 한 누리꾼은 지난 2월 “잘못된 행동을 해서 사과를 해야 할 때 입이 안 떨어진다”며 사과하는 법에 관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전문가는 사과가 서툰 사회의 요인을 온라인 중심 문화와 합리적이고 공정한 관계 선호, 갑질 문화 등에 있다고 분석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청년들은 온라인 소통을 많이 하다 보니까 사람 대하는 거 자체를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젊은 세대는 과거와 달리 무조건 복종하기보다는 권리 의식이 있다”며 “(사과를 받지 않는 사람들한테) 피해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감정 전달을 회피하려는 이유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김 교수는 “과거에 비해 서비스업이 늘어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도 심해지면서 갑질과 진상 문화가 늘어난 것도 한 요인”이라며 “사과하면 ‘괜찮다’고 넘어가는 것이 아닌, 무시하고 더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어려운 관계의) 연장자나 무례한 손님 등에게 두려움과 공포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예솔 기자 ysolzz6@kukinews.com
이예솔 기자
ysolzz6@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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