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완성차 제조사들이 국토교통부의 ‘페달 블랙박스’ 설치 권고를 사실상 거부하면서 직접 페달 블랙박스를 설치하는 운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급발진 사고 발생 시 ‘셀프 페달 블랙박스’가 완성차 제조사의 책임을 규명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페달 블랙박스는 차량 엑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 페달을 촬영하는 영상 장비로, 18일 현재 국토교통위원회 허영 의원이 한국교통안전공단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 2010년부터 2022년까지 급발진 의심 사고는 모두 766건에 달한다. 이 가운데 급발진을 인정받은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반면 해외의 경우 가속페달(액셀러레이터)의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 인정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일명 ‘페달 게이트’라고 불리는 토요타 리콜 사태(2009~2010년까지 발생한 급발진과 관련된 토요타 1000만대 리콜 사태로 사상 최대 규모) 이후 토요타는 노화된 액셀러레이터 페달이 밟힌 상태에서 회복이 안 되는 문제가 아주 드물게 발생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강릉 홍제동 소형 SUV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는 ‘급발진 사고 시 운전자가 자동차의 결함을 밝혀야 하는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지난해 12월 홍제동의 한 도로에서 할머니가 몰던 SUV 승용차가 도로 옆 지하통로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해 함께 타고 있던 12살 손자 도현 군이 숨졌다. 경찰은 할머니를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했다가 지난달 10일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없음'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이에 유족들은 지난 2월 국회 국민동의 청원에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시 결함 원인 입증책임 전환 제조물책임법 개정에 관한 청원'을 게시했다.
이후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차량 결함을 증명하기 위해 페달 블랙박스를 스스로 설치하는 운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는 “급발진 사고가 발생했을 때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는 모습이 페달 블랙박스에 찍힌다면 100% 증거로 쓸 수 있다”며 “제조사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가속 페달에서 발을 뗐는데 가속 상태가 유지된다는 건 모터 제어부 신호가 시그널을 잘못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라며 “전기차는 내연기관차에 비해 반응력이 바로 나타나는 게 특성인데 급발진 의심 사례 접수가 늘고 있어 운전자들 사이에서 셀프 페달 블랙박스 설치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설명했다.
차량 내 페달 블랙박스 설치는 영상 블랙박스와 같이 설치 의무가 없다.
김 교수는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하면 제조사들은 결백을 주장하는 것으로 일관했는데, 결백하다면 차량 제조 시 발을 비추는 카메라를 설치하면 간단하다”며 “차량 제조 시 OEM 제조 형식으로 페달 블랙박스를 설치하면 운전자가 구매해 설치하는 것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개발을 이유로 설치를 미룰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전기차 구매 후 페달 블랙박스를 설치한 박 씨(22)는 “페달 블랙박스는 위치만 잡아주면 설치는 10분 안에 끝날 정도로 간단하다”며 “구매 독려뿐만 아니라 운전자들이 안심하고 구매할 수 있도록 완성차 업계에서 적극적으로 급발진 의심 사고에 대한 규명을 해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편 더불어민주당 한준호 의원(고양시을)은 홍제동 차량 급발진 의심사고를 계기로 사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일명 ‘도현이법’으로 불리는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성능시험대행자가 사고 원인을 의무적으로 조사하고, 자동차제작자가 사고에 관한 입증자료를 제출하는 것을 주요 골자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국감에서 “(급발진 의심 사고에 대해) 여러 가지 방안을, 아직 확정된 결과는 안 나왔을지 모르지만 저희들이 다각도로 강구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조은비 기자 silver_b@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