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바이오 기업들이 글로벌 빅테크 기업과 손잡고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신약 개발에 뛰어들었다. AI 신약이 환자들의 미충족 의료 수요를 채우고, 평균 10년 이상 걸리는 신약 개발 기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될지 주목된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 엔비디아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AI 기술을 앞세워 각종 질병 진단 기술과 신약 개발 등 첨단 제약바이오 산업에 진출하고 있다.
구글이 설립한 신약 개발 기업 아이소모픽 랩스는 지난 7일(현지 시각) 글로벌 제약사 일라이 릴리, 노바티스와 저분자 화합물 신약 연구·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규모는 각각 17억달러(한화 약 2조2329억원), 12억달러(약 1조5762억원)에 달한다. 아이소모픽은 구글 딥마인드와 함께 AI를 기반으로 인체 내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구글은 지난해 5월 게놈 분석과 단백질 모델 예측에 특화된 클라우드 기반 AI 솔루션 2종을 선보이기도 했다. 당시 슈에타 마니아(Shweta Maniar) 구글 클라우드 생명과학 전략·솔루션 부문 디렉터는 “새로운 AI 기술은 신약 개발을 가속화하고, 치료제를 더 빨리 시장에 출시해 생명과학 분야를 혁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첨단 AI 반도체에 힘입어 시가총액 1조달러를 돌파한 엔비디아도 헬스케어와 바이오산업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엔비디아는 지난해 7월 AI 신약 개발사 리커전에 5000만달러(약 671억원)를 투자했다. 자사의 생성형 AI 플랫폼 ‘바이오네모’를 고도화해 다수의 AI 신약 개발 기업과도 협업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AI를 활용한 질병 진단 기술 개발에 나섰다. 지난해 9월 임상 AI 분야 기업 페이지와 AI 암 진단 모델 구축에 협력하기로 했다. 초기 암 진단 모델을 보유한 페이지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방대한 AI 기술을 활용해 세계 최대 규모의 암 진단 AI를 개발한단 계획이다.
빅테크 기업과 제약바이오 업계가 AI 신약 개발에 적극적인 만큼 시장 전망도 밝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식의약 R&D 이슈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6억980만달러(약 8192억원)에 불과했던 AI 신약 세계 시장 규모는 연평균 45.7% 성장해 2027년엔 40억350만달러(약 5조2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신약 개발은 대표적인 고위험·고수익 사업이다. 비용과 시간은 많이 소요되는 데 비해 성공률은 낮기 때문이다. 글로벌 상위 12개 제약사 기준 신약 하나를 출시하기까지 평균 10~12년이 소요된다. 연구개발(R&D) 비용은 약 2조8000억원에 이른다. 하지만 초기 단계부터 AI를 활용하면 신약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단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전문가들은 AI 신약이 일반 신약 대비 개발 기간이 2~4년 더 짧고, 비용도 40~50%가량 덜 소요될 것으로 분석한다. 유소영 서울아산병원 빅데이터연구센터 교수(대한의사협회 정보통신이사)는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신약 개발에 AI를 도입하면 약물 탐색과 선별, 임상 데이터 분석, 환자 선별 과정을 자동화하고 가속화해 개발 비용과 기간을 각각 40~50%, 20~30% 정도 줄일 수 있다”고 짚었다.
전통 제약사, AI 신약 개발 플랫폼들과 협업
AI 신약이 주목받자 국내 기업들도 기술 확보·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카카오의 AI 자회사 카카오브레인은 지난 2022년 AI 기반 신약 설계 플랫폼 스타트업 갤럭스와 공동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카카오브레인은 올해부터 제약사와 협업해 신약 개발에 착수할 계획이다.
대웅제약은 지난해 10월 독일 머크 라이프사이언스와 협약을 갖고 머크의 신약 개발 소프트웨어 ‘신시아’를 활용해 신약후보 물질을 발굴·검증하기로 했다. JW중외제약의 자회사 C&C 신약연구소도 미국 AI 신약 개발 기업 크리스탈파이와 공동연구 협약을 맺고 저분자 화합물 치료제 개발에 나섰다.
세포치료제 개발 전문 기업 GC셀은 의료 AI 기업 루닛과 유방암, 위암 등 고형암 신약 후보물질 ‘AB-201’에 대한 공동연구 계약을 체결했다. 이번 계약으로 루닛이 개발 중인 AI 바이오마커 ‘루닛 스코프 IO’를 이용해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외에도 HK이노엔, 보령, 유한양행 등 전통 제약사들이 AI 신약 개발 플랫폼 기업들과 협업하고 있다.
정부도 AI 신약 R&D 지원에 힘을 싣고 있다. 2019년 150건이던 AI 신약 개발 관련 R&D 과제는 작년 11월 기준 541건으로 4배가량 증가했다. R&D 투자비도 2017년 약 280억원에서 2023년 2300억원으로 대폭 늘었다.
단체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지난 12일 AI신약융합연구원(CAIID)을 설립했다. CAIID는 AI 신약 개발 과제 발굴·기획, 전문인력 양성 교육 홍보, AI 신약 개발 포럼 등을 전개할 계획이다. 초대 원장은 김화종 강원대 교수가, 부원장은 김우연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가 맡는다. 노연홍 협회 회장은 “AI 기술이 신약 개발의 패러다임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며 “AI신약융합연구원이 AI 기술과 바이오 기술 융합을 통해 혁신신약 개발을 앞당기는 대표적 연구기관이 되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AI 기술이 신약 개발 기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것은 맞지만 한계도 있다. 유 교수는 “AI 모델이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패턴을 학습하려면 고품질의 데이터가 필수적”이라며 “특정 조건에서 얻는 데이터만으로 AI가 학습되지 않도록 현실 임상 환경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반영한 데이터를 사용해야 한다”고 짚었다. 아울러 “과도하게 AI에 의존하지 않고 과학적으로 데이터를 해석하는 것이 AI 신약 개발에 있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