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 역사 왜곡 도구가 되고 있다. 인물이나 상징, 세계관을 활용해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오해를 만들거나 이를 왜곡하는 사례가 반복돼서다. 이를 예방하고 적극 대응할 정부 조직이 없어 사실상 ‘손 놓고 있는 상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18일 쿠키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슬롯머신 게임이 영국 게임사이트에서 유통되고 있다. 이순신 장군에 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경우, 실제와 다른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중국풍 갑옷과 일본도에 가까운 모습의 장검을 들고 있어 중국이나 일본 장군으로 오인할 우려도 있다.
정부 기관은 적극 대응에 나서겠다고 밝혔지만, 한 발 늦은 대처라는 비판이 나온다.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는 게임물관리위원회(게임위)를 통해 한국서 유통되지 않도록 차단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논란이 되고 나서야 대응하는 사후적 조치여서다. 국내 유통만 막는다는 한계도 있다. 해당 게임을 홍보하는 영상 역시 여전히 동영상 플랫폼서 재생할 수 있다.
게임 속 역사 왜곡 사례에 발 빠르게 대응할 조직이나 기관은 없는 상태다. 역사 관련 사안을 모니터링하는 전담 조직이나 이용자 등으로부터 민원⋅신고를 받을 핫라인 모두 없다.
역사 왜곡 논란은 꾸준히 반복되고 있다. 지난 2022년 중국 개발사 ‘4399’가 ‘문명 정복: Era of Conquest’에서 이순신 장군을 중국 문명 소속으로 표기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페이퍼게임즈 ‘샤이닝니키’에서도 한복이 중국 의상이라고 해 한국 이용자들이 항의한 후에야 아이템 폐기 등 조치가 이뤄졌다.
최근 한국서 정식 출시하지 않기로 결정한 팀 닌자의 ‘라이즈 오브 더 로닌’ 역시 이른바 ‘우익 사관’으로 논란이 됐다. 게임 제작을 총괄하는 야스다 후미히코 디렉터가 일본 근대 사상가 요시다 쇼인을 두고 “그의 삶의 방식이나 남긴 말을 ‘로닌’ 속에 그려내고 싶다”고 말해서다. 요시다 쇼인은 무력으로라도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창했다.
이용자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개발자의 역사적 인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게임은 무엇보다 세계관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치권 관계자 역시 “게임은 세계관과 개개인의 스토리, 캐릭터 등에 몰입하게끔 만들어 역사 왜곡이 더욱 문제가 된다”고 설명했다.
반복된 논란에 게임위 위원 자격으로 ‘역사’를 추가하는 법안이 지난해 공포돼 지난달부터 시행되고 있지만 실효성이 부족하다. 위원 자격은 필수로 갖춰야 하는 게 아니라 고려조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역사 전문성 있는 위원도 임명할 수 있다’는 권고 차원으로 그치는 상황이다.
역사 분야 전문가가 위원으로 포함돼도 문제가 남는다. 게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해서다. 위정현 한국게임학회 학회장은 “게임에 관한 이해가 없다면 그래픽만 보고 판단하는 등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문체부 등 정부 기관에서 상시적으로 모니터링을 하거나 핫라인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어 그는 “역사는 중요한 부분이다. 게임은 특히 전 세계로 확산이 잘 되기 때문에 모든 게임을 관리⋅감독할 순 없더라도, 논란이 되는 게임에는 신속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채리 기자 cyu@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