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 입학 정원 증원 등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병원을 이탈한 후 벌어진 의료공백을 수습하느라 건강보험 재정이 과도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정부의 의료개혁 추진으로 건강보험 준비금이 예상보다 빠르게 소진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건보 재정이 아닌 국가 재정을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4일 의료계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국회예산정책처(정책처)가 발표한 ‘2025년도 예산안 12대 분야별 재원 배분 분석’ 보고서를 보면 인구 고령화와 보장성 강화 등으로 인해 지출은 늘고 저출생 등에 따라 수입은 정체되면서 건보 재정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건강보험은 올해부터 재정수지 적자로 전환돼 적자폭이 커진다. 정책처의 ‘2023~2032년 건강보험 재정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부터 건보 재정 당기수지 적자가 예상된다. 2028년에는 적자액이 누적돼 적립금 소진이 예상되고, 2032년 누적 적자액이 61조6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누적 건보 적립금은 27조9977억원이다.
정책처는 “정부 지원금을 제외할 경우 당기수지 흑자로 전환된 최근 3년간(2021~2023년) 실질 재정수지는 평균 약 6조8000억원 규모로 적자가 발생하는 상황”이라며 “최근 건강보험 재정 전망 결과와 실질 재정수지 현황 등을 고려했을 때 건강보험 지출 증가를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면 이를 충당하는 비용은 보험료와 조세를 납부하는 가입자와 국민에게 이중 부담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의료개혁 추진으로 건강보험 당기수지 적자 전환 시점과 누적 준비금 소진 시점이 빨라질 것으로 예측했다. 앞서 보건복지부는 지난 8월30일 향후 5년 동안 국가 재정 10조원과 건보 재정 10조원을 합해 총 20조원 이상을 의료개혁에 투입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의료개혁 1차 실행 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이와 별도로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시범사업에도 오는 2027년까지 건보 재정 10조원 이상이 투입된다.
의료공백 사태 대응에 건보 재정 투입을 늘리고 있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2월부터 전공의 이탈에 따른 비상진료체계 운영과 경영이 어려운 수련병원들에 선지급금 투입분 등으로 2조원이 넘는 건보 재정을 쏟아부었다. 지난달에도 재정 약 2100억원을 추가로 투입했다. 정부는 의사 집단행동으로 인한 중증·응급환자의 진료공백을 방지하고 환자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비상진료 ‘심각’ 단계 해지 시까지 매달 2085억원을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정책처는 “최근 건보 재정 전망 결과와 실질적인 재정수지 현황 등을 고려했을 때 건보 재정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면서 “의료공백 사태 대응을 위해 투입된 건보 재정 규모와 향후 의료개혁 추진 및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등에 대한 건보 재정 투입 계획을 고려한다면 건보 당기수지 적자 전환 시점과 누적 준비금 소진 시점이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의료공백 사태 대응과 의료개혁 과제 추진 과정에서 건보 재정을 과도하게 투입하기보다는 국회의 예산 심의 과정을 거친 후 국가 재정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라며 “건강보험 지출 증가를 적절하게 통제하는 방안을 마련해 검토하는 등 국민들의 보험료로 운영되는 재정의 안정적인 운영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부족한 국고 지원도 부담 요소 중 하나다. 정부는 건보 재정 안정을 위해 건보공단에 해당 연도 건강보험료 예상수입액의 14%를 일반회계(담뱃세로 조성한 건강증진기금 포함 시 20%)로 지원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지난 2007년부터 올해까지 18년간 단 한 번도 법정 비율을 지키지 않았다. 건보공단이 전진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정부가 지난 18년간 건보공단에 덜 낸 법정지원금은 21조6700억원에 달한다. 정부의 국고 지원이 줄어들면 가입자들이 보험료를 더 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국고 지원에 소극적이다. 기획재정부는 지난달 24일 ‘2025년 예산안 9문 9답’ 자료를 내고 내년 건강보험 국고지원금 예산안을 법정 비율보다 1조6000억원 덜 편성한 데 대해 “건강보험은 보험료 수입으로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다”라고 선을 그었다. 건보 국고지원금도 건보료와 마찬가지로 국민의 부담으로 조성되고, 국가 재정 적자로 인해 미래세대가 부담해야 할 국채 발행으로 충당되는 만큼 지원 규모를 신중하게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재부는 “2000년 의약분업 당시 일시적으로 악화된 건강보험 수지를 보완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국고 지원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일몰제로 연장 지원해오고 있다”라며 “정부는 법 규정과 국가 재정 상황, 건보 재정수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국고 지원 규모를 결정해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민단체들은 의료공백이 일시적인 위기인 만큼 건보 재정으로 지원할 게 아니라 정부가 국회의 동의를 얻어 일반예산에서 집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참여연대 측은 “정책 실패로 자초한 재난 상황에서 정부가 절차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건보 재정을 사용하는 건 비민주적”이라며 “당장 대형병원 재정 위기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해 급조된 정책은 준비 없는 2000명 의대 증원의 파국과 비슷한 위기만 부추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료대란 대응에 따른 건보 재정 악화 문제는 올해 국정감사장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지난달 16일 건보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대상으로 이뤄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들은 “책임의식을 가져라”, “건보 재정을 곶감 빼먹듯 계속 빼먹으면 어떡하나”라며 질타를 쏟아냈다. 국회 복지위 위원장인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정부의 건강보험 종합계획에 새로운 변수들이 계속 생기고 있다”면서 “재정 건전성 확보 방안을 마련하려면 새로운 재정 시나리오가 만들어지고 투명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재정 당국은 의료대란을 막기 위해 적지 않은 건보 재정이 들어갔지만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정기석 건보공단 이사장은 지난달 16일 국회 복지위 국감에서 “일정 기간 안에 건강보험 재정수지가 적자로 돌아갈 것으로 예측돼 유념해서 보고 있다”면서도 “아직까지 공단이 예측했던 금년도 급여 지출 총액보다는 적게 나가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