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 자랑스러운 역사만 알리려 했고, 부끄러운 일은 감추고 있었다. 이는 향토사 연구의 바른 자세가 아니고 향토 사랑의 옳은 길도 아니다.
필자의 향토사 글 주제는 임진왜란 때인 1594년 천안 직산 중심으로 일어난 ‘송유진의 난(亂)’이다. 왜란 시기 첫 역모사건으로 한국사학계가 관심을 갖는 사건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향토사학계 언급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1997년 발행된 『천안시지(市誌)』는 물론이고, 2014년 구축한 ‘디지털천안문화대전’에서도 송유진 이름조차 찾을 수 없다. 2008년 이후 충청권 대학교수 필진이 참여한 ‘천안학’ 교재서도 송유진의 난은 실종됐다.
임진왜란 때 현재 충남지역은 왜적 침략을 받지 않은 곳이다. 그렇지만 백성들은 군량미·병력 징발 때문에 어려움이 극심했다. 1594년은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때였다. 의병 출신 송유진이 직산으로 흘러들어 오면서 역모가 꿈틀댔다. 서울·진천 등지 외지인과 직산 홍씨 일족 등 천안·아산 사람들이 대거 참여했다.
선조실록에는 역모자들의 심문 기록이 자세하다. 이들은 “백성들을 어려움에서 구하고자 일어났다”고 천명했다. 여느 도적들과는 판이한 행동을 보였다. 군량 등을 징발했지만 양반 및 백성을 절대 해치지 않았다. 이런 태도에 조선 조정은 되레 겁을 먹었다.
송유진 일당은 구체적 목적과 실현 방법을 갖고 있었다. 백성과 명나라 신뢰가 두터운 광해군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 방비가 허술한 서울로 올라가 임시행궁에 있던 선조를 포위하고, 왕위서 내려앉힐 속셈이었다. 백성을 수탈로부터 구하기 위해 ‘정권 교체’를 하려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역모 사건은 여럿 있었다. 이시애의 난, 이괄의 난, 이인좌의 난은 양반 관료 및 사족들이 지역 불만, 인사 불만, 당파 불만 등으로 벌인 반란이었다. 중종반정, 인조반정도 고위 관료들 이해가 개입된 사건이었다. 모두 백성을 위한 거사는 아니었다. 양반들이 일파의 불만에서 일어섰다. 자신들 이익 쟁취를 위한 난이었고 반정이었다.
송유진 역모사건은 미수로 끝났다. 함께 주도하던 직산 홍씨 일족이 갑자기 배신했다. ‘괴수를 체포하거나 베는 자’는 죄를 묻지 않을 뿐 아니라 벼슬을 내려주겠다는 조정 회유책에 넘어갔다. 송유진 등 주모자급 10여 명을 직접 붙잡아 직산현 관아에 넘겼다. 반면 1596년 부여 홍산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은 거사에 성공했다. 하지만 송유진처럼 왕권 교체라는 구체적 목적을 설정하지 않은 한계가 있다.
이로써 보건대 송유진의 난은 결코 부끄러운 향토사는 아니다. 외려 자랑스럽다고 볼 수 있다. 아무도 안 나설 때, 왜란으로 극심한 고초를 겪는 백성을 위해 일어났다. 송유진 일당은 전주에 있던 광해군에게 밀서를 보냈다. “임금(선조)의 죄악은 고쳐지지 않고 조정의 당쟁은 풀리지 않았다. 부역이 번거롭고 무거워 민생이 불안하다...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죄인에 벌 주니 실로 탕무(湯武)에 빛이 되리로다.” 탕무는 폭군을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운 중국 은나라 탕왕, 주나라 무왕을 말한다. 송유진이 왕권 교체를 넘어서 왕조 교체를 꿈꾼 건 아닐까.
고려·조선 봉건왕조의 500년 지속이 역사발전적 측면에서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지배세력의 무능함이 폭로된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고도 그 왕조가 지속된 게 자랑스러운 역사는 아니다. 송유진의 난은 미수로 끝났지만, 이 시기 왕권 교체를 통해 민생고를 해결하려고 일어난 역모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