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청창이 광산 김씨 죽은 남편의 묘지명을 직접 지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었다. 영조 초기 1729년 때 일이다. 근데 그 글이 지금까지 명문으로 전해온다. 당시 남편 친척이자 노론 영수였던 이재가 그 글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곽청창은 천안향토사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당시 그녀가 목천 출신이라서 같은 지역 출신 김종식 선생에게 슬쩍 물어봤다. “혹시 곽청창이라는 조선시대 여류시인을 아는가. 영조 스승이었던 곽시징의 딸이라고 하더라.” 김 선생은 처음엔 잘 모르겠다고 하더니 며칠 뒤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다. 오래전 광산 김씨 후손이 청화백자 지석 두 편과 짧은 필사본 책을 간직하고 있어 각각 사진을 찍고, 복사해 뒀다는 것이다. 그 지석이 바로 곽청창이 지은 묘지명이었고, 필사본은 그녀의 행장이었다.
묘지명 지석의 존재도 놀라웠지만, 내용은 이미 알려진 대로다. 그러나 곽청창 행장은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그동안 알 수 없었던 그녀의 생몰연도가 확인됐다. 1761년 79세로 사망했다고 하니, 곽청창은 1683년 태어난 것이다.
그의 글이 많이 전해지지 않는 이유도 알게 됐다. 생전에 지은 글들을 모두 불태우며 “이는 아녀자가 할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잘 모르고 바깥 사람들에게 보여줄까 두렵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 선생은 곽청창과 관련해 이달 초 발행된 『천안향토연구』 11집에 글을 실었다.
곽청창과의 ‘놀라운 만남’ 직후, 또 한 여인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났다. 천안에 묻힌 박문수 때문에 암행어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였다. 1822년 평안도 암행어사 박내겸의 일기 속에서 기생시인 김부용(金芙蓉)과 마주쳤다, 김부용은 천안출신 원로대신 김이양의 첩으로, 죽어서는 광덕산에 묻혔다. 50년 전 소설가 정비석에 의해 묘 위치가 밝혀졌고 천안문화예술계가 매년 추모제를 지내는 인물이다.
평양 인근 성천 출신으로 황진이·이매창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생 시인으로 일컫는다. “다채롭고 발랄하다”는 평가대로 시에 재치가 넘친다. 김부용이 박래겸과 처음 만나는 장면도 그녀 매력이 톡톡 튄다.
1822년 음력 5월 5일 저녁이었다. 어사가 친구가 부사로 있는 성천 관아를 들렀다. 툇마루에 앉아 있자니 젊은 기생[少妓]이 다가와 말을 붙였다.
“제가 겪어본 사람이 많습니다. 손님께서는 결코 궁하고 어려운 분이 아니신데 행색은 왜 이렇게 초라하신지요. 다시는 제가 선비님들 관상 볼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귀한 상을 가진 얼굴이 초라한 암행어사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박내겸이 농담으로 받았다. “지나간 일이야 그렇다 치고 앞길에 좋은 바람 부는 시절이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자네에게 황금 집을 지어 주겠네.” 이 말에 부용이 뾰로통해 쏘아부쳤다. “옛말에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인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 얼굴을 꾸민다고 하였거늘… 손님께서는 저를 속마음이 통하는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듯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곽청창과 김부용은 100여 년 차이를 두고 태어났다. 곽청창은 목천에서 태어나 멀지 않은 전의로 시집갔다. 김부용은 평북 성천에서 태어나 서울서 활동하다 남편의 고향 천안에 묻혔다. 천안은 다른 지역엔 한 명도 있기 힘든 조선 여성문인을 두 명이나 갖고 있다. 귀중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