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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한국 바둑에 첫 번째 ‘세계 제패’ 영광을 가져다 준 무대 싱가포르에서 ‘新 바둑황제’ 신진서 9단이 ‘메이저 8관’ 등극에 성공했다.
신진서 9단은 지난 2월28일 싱가포르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 막을 내린 제1회 난양배 월드바둑마스터스 결승3번기에서 중국 신성 왕싱하오 9단은 2-0으로 완파했다. 2000년생 신진서 9단과 2004년생 왕싱하오 9단이 격돌한 이번 대결은 신 9단 입장에선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자신보다 어린 상대와 맞붙은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이었다.
중국룰로 진행한 이번 대회 결승 1국에서 신 9단은 백을 잡고 완승을 거뒀다. 중국룰은 특성상 ‘덤’을 홀수로 가져갈 수밖에 없는데, 과거 5집반에서 현재는 7집반으로 크기가 커졌다. ‘알파고’ 이후 바둑에 ‘실시간 승률 그래프’가 도입되면서 첫 수부터 승률을 계산할 수 있게 됐는데, 덤이 7집반일 경우에는 백번 승률이 시작부터 60%를 상회한다. 한국과 일본룰에서 채택하고 있는 ‘6집반’ 덤의 경우에도 백번 승률이 50%보다 높기 때문에, 현대 바둑에서 대부분의 프로기사들은 흑보다는 백을 선호한다. 과거 이창호 9단이 세계를 제패하던 당시 ‘흑번 필승’ 신화를 썼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따라서 결승2국, 신진서 9단이 흑을 잡고 대국한 28일 경기에 바둑 팬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는 신 9단은 징크스 아닌 징크스 영향이기도 했다. 그동안 우승을 차지한 7번의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에선 모두 ‘완봉승’을 거뒀고, 결승 시리즈에서 한 판이라도 패한 대회에선 준우승했기 때문이다.
신진서 9단은 결승 2국에서 ‘비장의 포석’을 펼쳤다. 덤이 큰 흑번은 시작부터 불리하다는 리스크가 있는 대신 판을 주도적으로 짤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는 데 착안한 전략이었다. 초반은 이 작전이 먹혀들면서 팽팽했다.
하지만 중국이 ‘커제 이후 최고 기재’로 손꼽는 왕싱하오 9단은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신 9단이 준비해온 포석이었음에도 중반 이후 인공지능 승률 그래프는 조금씩 왕싱하오 9단 쪽으로 이동했고, 중반전이 한창인 순간에는 백(왕싱하오) 쪽으로 크게 기울기도 했다. 신 9단의 위기였다.
이전 신진서 9단과 지금의 신 9단이 달라진 모습을 보인 건 바로 이때부터였다. 핀치에 몰린 신 9단은 특유의 정교한 수읽기를 바탕으로 왕싱하오 9단의 빈틈을 찔러가면서 조금씩, 한 발 한 발 추격해나가기 시작했다. 불리한 상황에서 과한 승부수로 형세를 그르칠 때가 있었던 과거와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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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세계대회 결승 무대가 이번이 처음인 왕싱하오 9단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흔히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을 ‘심장 싸움’이라고 한다. 아무리 기량이 출중한 선수라 하더라도 중압감 때문에 기량을 제대로 펼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신 9단은 ‘후배’ 왕싱하오 9단의 바늘 끝만 한 빈틈을 적확하게 응징하면서 순식간에 역전에 성공했고, 이후부터는 신 9단의 독무대였다.
난양배를 품은 신 9단은 2012년 프로 입단 후 13년 만에 통산 타이틀 획득 40회 금자탑을 쌓았다. 이중 메이저 세계대회 우승 횟수는 8회로, 이 부문 공동 4위에 올랐다. 1위는 이창호 9단의 17회, 2위는 이세돌 9단의 14회, 3위는 조훈현 9단의 9회다. 신 9단은 중국의 구리 9단, 커제 9단과 우승 횟수는 8회로 동일하지만, 메이저 세계대회 준우승 횟수에선 5회로 압도적이다. 결승서 아쉬운 패배가 많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세계대회 결승 진출 횟수가 많았다는 방증이다.
이에 더해 신 9단은 ‘바둑 삼국지’로 불리는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전무후무한 ‘18연승’ 신기록을 작성하면서 5년 연속 한국 우승을 스스로 결정했다. 이는 이창호 9단이 갖고 있던 14연승 기록을 훌쩍 뛰어넘는 성과다. 농심신라면배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최정예 기사 5인이 출전해 ‘연승전’ 형식으로 맞붙는 대회로, 바둑 역사상 가장 인기가 있는 형태의 대회다. 세계대회가 없던 시절 중국과 일본은 변방국인 한국을 제외하고 ‘중·일 슈퍼대항전’을 농심배와 같은 방식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이 대회에서 ‘시진핑 죽마고우’ 녜웨이핑 9단이 중국에 3년 연속 우승을 안기면서 ‘철의 수문장’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신진서 9단은 “난양배에서 우승하고 농심배도 잘 마무리해서 올해 기분 좋게 출발해 기쁘다”면서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올 한 해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다”는 소감을 전했다.
한편 최고의 기량을 뽐내고 있는 신 9단은 올해 4월 개최 예정인 초대 북해신역배 세계바둑오픈전에서 메이저 세계대회 9회 우승에 도전한다. 아울러 올해 연말 열리는 삼성화재배를 비롯해 본선은 올해, 결승은 내년 초에 진행하는 LG배, 몽백합배 등 세계대회 우승을 정조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