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정부 출범에 힘입어 제약바이오 업계에 훈풍이 불 것이란 기대감이 나온다. 대선 공약으로 제시된 ‘연구개발(R&D) 연동 약가 보상 체계’에 더해 신약 개발 투자 지원 구조가 맞물리면 산업 성장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5일 업계와 정치권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이 지난달 공개한 정책공약집을 통해 제약바이오산업을 첨단산업으로 지정하고, 경제안보 주축 및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특히 ‘글로벌 5대 바이오 강국 도약’을 목표로 전략적 R&D 투자와 제약기업의 혁신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정부는 제약사들의 R&D 투자에 대한 보상체계를 개편할 계획이다. 구체적으로 신약 개발에 대한 지속적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제약사의 R&D 투자 비율에 연동된 약가 보상 체계를 도입한다. R&D 비중이 높은 기업에 상대적으로 높은 약가를 적용하고 혁신형 제약기업의 성장을 유도하겠다는 전략이다.
혁신형 제약기업 인증제도 개선과 사회적 기여 방식의 다양화, 성과 기반 공공 환원형 투자 모델 운영 등도 함께 추진한다. 이외에도 바이오 특화 펀드 조성, 인공지능(AI)·빅데이터 기반 신약 개발 생태계 조성, 제약바이오 전문 인력 양성 등 인프라 확충, 국산 원료 사용 완제의약품에 대한 인센티브 확대 방안 등이 포함됐다.
장기화된 의약품 수급 불안정 문제도 해결 과제로 제시했다. 필수의약품에 한정해 ‘성분명 처방’을 도입하고, 대체조제 활성화 및 공공 위탁 생산·유통 시스템 구축을 통해 국가 필수약의 안정적 공급 체계를 마련한다는 구상이다. 성분명 처방이란 의사가 처방전에 특정 제약사의 약제 상표명을 기재하는 대신 성분명을 적도록 하는 방식이다.
코로나19 같은 감염병 팬데믹 대비 위기 대응 인프라 조성과 국제 협력 확대 강화책도 공약에 담았다. 메신저 리보핵산(mRNA), 합성항원기술 등 차세대 백신 플랫폼 R&D 지원을 늘리고, 넥스트 팬데믹을 대비하는 거버넌스와 감염병 대응 체계를 강화할 방침이다.
이 대통령은 AI 기반 디지털 헬스케어 혁신 성장 시스템을 갖추고, 의료 분야 AI 전문 인력의 전주기적 투자·양성 체제를 마련하겠다고도 했다. 또 의료기기 산업에 대한 적정 보상을 추진하고, 불공정 행위 개선을 통한 의료기기 산업 유통구조 선진화를 꾀할 예정이다. 아울러 의사과학자 확보를 위한 연구 지원 체계를 세우고, 전국 각지의 의대·이공계 대학원 간 공동 연구 프로그램을 수립하는 등 의과학 융복합 지원을 보강하겠다고 했다.
규제 완화 및 R&D 전문인력 양성 기대감
이재명 정부는 이 같은 정책들로 제약바이오산업의 규제 완화와 안정성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 R&D 전문 인력을 대거 양성해 전 정부와 차별점을 둘 계획이다. 그간 임상시험 규제 강화는 바이오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했다. 한국은 규제과학이 발전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거나 기존의 제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반기지 않는 보수적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과 유럽 등은 ‘소극적 규제’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명문으로 금지된 행위 외에는 모든 R&D를 시도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기존 기술과 약물 가운데 유사한 물질이 없는 혁신 신약 개발에 유리한 규제 구조다.
혁신 신약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 희귀·난치질환자들의 의약품 접근성을 높일 필요도 있다. 해외 선진국과 비교해 한국의 의약품 접근성은 낮은 편이다. 유승래 동덕여대 약학대학 교수의 ‘신약의 치료군별 약품비 지출 현황 분석’ 연구에 따르면, 최근 6년간(2017~2022년) 국내 건강보험 재정 중 신약에 대한 지출은 총 약품비 대비 13.5%에 불과했다. A8(영국,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일본, 미국, 캐나다) 국가 평균인 38%,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33.9%와 비교하면 절반 이하 수준이다.
미국은 의료비가 비싼 국가임에도 신약 접근성은 가장 높다. 2023년 미국제약협회(PhRMA)의 ‘글로벌 신약 접근성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신약 약품비 지출 비중은 47.9%에 이른다. 새로운 의약품이 글로벌 시장에 출시된 이후 공공의료보험에 포함되는 속도는 4개월에 불과하다. 독일은 11개월, 일본은 17개월이 걸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한국은 신약이 건보 적용을 받기까지 평균 28개월이 소요된다. 신약 개발·사용에 불리한 환경은 임상시험 시도와 R&D 투자를 위축시켜 기업과 환자의 고충으로 이어진다. 이에 이 대통령은 희귀·난치질환에 적용되는 산정특례 본인부담률을 낮추고, 관련 치료제의 건보 등재 제도 개선을 약속했다.
자금난으로 인해 R&D 추진에 어려움을 겪는 바이오 기업이 적지 않은 만큼 이들에 대한 지원도 필요해 보인다. 한국바이오협회가 최근 국내 136개 바이오 기업 최고경영자 및 임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 기업 중 74%가 현재 자금 사정이 원활하지 않으며, 76%는 자금난으로 R&D 일정에 차질이 발생했다고 답했다. 바이오 기업 창업을 후회한다는 29%는 △자금 조달 어려움 △과도한 규제 △장기적 산업 육성 정책 부재 등 구조적 문제가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업계에선 제약바이오산업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고 지원하기 위해 전문가로 구성된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 윤석열 정부에서 국무총리 직속 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와 대통령 직속 국가바이오위원회가 신설됐지만, 실효성 있는 정책을 내놓지 못했고 비상계엄 후 활동이 축소되는 등 아쉬움만 남겼다.
윤영미 보건의료정책연대 공동대표는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고도화된 ICT 기술을 제약바이오산업에 접목하고, 산업에 대한 적극적 지원에 나서겠다고 발표한 데 대해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며 “보건의료의 특수성, 전문성, 공공성을 고려할 때 정책 입안 과정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지만, 차근차근 규제를 완화하다 보면 더 높은 수준의 산업 발전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기화된 의약품 품절 문제에 대해선 “단순히 약가 인상만 해선 의약품 품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새 정부는 의약품 품절의 원인이 무엇인지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단계별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라며 “의약품 품절 문제에 대한 포괄적 해결책이 나오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