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1977년 일본 오사카예술대학에서 진행한 하계 서머스쿨에 참가했던 권명광(67·사진) 홍익대 총장은 당시 미국 유학생들의 판화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테크닉은 좀 떨어지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에게서는 발견하기 힘든, 자신의 상상력을 거리낌없이 작품에 구현해내는 모습을 보며 미술에 대한 선입견만 심어줬던 국내 미술교육의 문제점을 실감했던 것이다.
권 총장은 “서양화가 故 최욱경씨가 지난 83년 미대 실기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그린 그림이 모두 똑같아 기절초풍할 뻔 했다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던 적이 있다”며 “요즘도 실기고사장에 들어가면 같은 학원에 다닌 학생들의 그림은 똑같다”고 털어놓았다.
미대 실기시험 반영 비율을 점차 줄여 2013학년도부터는 실기시험을 아예 보지 않겠다는 홍대 미대의 파격적인 입시안은 이같은 권 총장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그는 31일 본보와 인터뷰를 갖고 “사교육을 통해 훈련된 기능인 보다 풍부한 사고력을 갖춘 학생을 뽑겠다”며 “미술교육을 적극적으로 실시한 고등학교에 대해서는 입시에서 우대하겠다”고 밝혔다.
-실기고사를 폐지하기로 한 진짜 이유가 궁금하다.
“사교육의 폐단을 줄이고 공교육을 정상화하자는 것이다. 학생들이 실기고사 준비에 엄청난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있다. 다른 교과목은 공부할 시간도 없다. 학생들끼리 먹고 먹히는 ‘정글 게임’만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미술 인재는 과거와는 다르다. 창의력과 예술적인 감수성을 골고루 갖춰야 한다. 미술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미대 실기고사는 학원에서 그림 그리는 법을 잘 암기해온 학생들만 합격한다. 실기고사장에서는 시간에 쫓기느라
작품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실기고사가 폐지되면 어떻게 뽑나.
“1단계 전형에서는 학생부를 중심으로 서류 평가를 하고 2단계에서는 심층면접을 실시한다. 심층면접에는 미술 전문 입학사정관들과 미대 전임교수 100여명이 거의 대부분 참가한다.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입시안을 바꾼 만큼 미술교육을 적극적으로 실시한 고등학교 출신들을 입시에서 우대하겠다.”
-홍대 미대가 요구하는 인재는 어떤 학생인가.
“‘얼음이 녹으면 뭐가 되느냐’라고 물으면 많은 학생들이 ‘물이 된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봄이 온다’고 답하는 학생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인재는 바로 이처럼 사고의 폭이 남다른 학생이다. ‘화가 중에서 누구를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고흐나 세잔느를 좋아한다’라고 말하는 학생보다는 ’인상파 작가들을 좋아한다’고 대답하는 수험생을 선호할 것이다. 미술에 대한 관심과 상식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실기고사를 유지하되 반영비율을 줄이거나 사교육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독창적인 방법은 없는가.
“반영비율을 줄여봤자 수험생 입장에서는 똑같다. 실기고사 성적을 10% 반영하든 5% 반영하든 학생들은 지금하고 똑같은 수준으로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만의 독특한 실기고사도 시행해봤다. 학생들이 학원에서 그림 그리는 법을 외워서 오니까 이를 막기 위해 실기고사장 석고상을 뒤집어놓기도 하고 석고상에 하얀 천을 걸쳐놓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해가 되면 이런 유형의 그림 그리는 법까지 학원에서 익혀서 오더라.”
-‘깜짝 입시안’에 대해 정작 홍대 미대 교수들도 몰랐다는 보도가 있었다. 충분한 의견수렴 없이 입시안 발표를 강행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학과장 회의도 수차례 했고 교수들과도 충분히 상의했다. 입시안 발표 날짜만 교수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외부에 알려지면 경쟁대학에서 우리가 준비한 입시안을 미리 발표해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입시비리로 얼룩진 홍대 미대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내놓은 고육지책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편하게 학생들을 뽑자면 실기고사를 계속 치는 게 좋다. 지난해 입시에서 미대 자율전공 전형에서 실기고사를 보지 않고 71명을 뽑았다. 교수 100명이 동원돼 하루 종일 면접을 봤다. 입학전형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하는 것은 대학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미지 쇄신 차원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미술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미술은 현대인이 갖춰야할 기본적인 소양이다. 심리적인 병을 치유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술의 사회적인 기능과 역할을 되찾아야 할 시점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박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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