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정치] 정치 선진국에서는 법안 표결 기록이 국회의원에 대한 의정 평가와 차기 선거의 판단 기준으로 유용하게 쓰인다.
의원내각제를 택한 유럽과 일본은 입법부인 의회가 행정부인 내각을 구성하기 때문에 정당별 투표 경향이 강하다. 여당이 낸 법안에 대해 여당 내 반대표를 거의 찾을 수 없다. 만일 반대표가 나와 법안이 부결되면 이는 곧 내각 해산과 조기 총선의 수순으로 읽힌다. 90%대를 넘는 높은 찬성률이 나오는 이유다.
반면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은 행정부와 의회의 권한이 명확하게 나뉘어져 있으며 의회의 자유투표가 보장된다. 우리는 대통령제이지만 국회 본회의 투표 성향(불참 제외 찬성률 96.2%)만 놓고 보면 의원내각제에 가깝다. 대통령이 깃발을 들고 법안에 대한 찬성을 독려하면 의회도 그대로 달려가는 모양새다.
미 의회의 자유투표제는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미 하원은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본회의 표결 결과(roll-call vote)를 배너 형태로 게재한다. 최근 4년간 의원들이 법안에 찬성 반대 기권 불참 중 어떤 선택을 했는지 한눈에 찾아볼 수 있다.
이를 전담해 분석하는 단체들도 많다. 미국민주연합(ADA)과 미국보수주의연합(ACU)은 각각 1947년과 1971년부터 상원과 하원의 투표 기록을 바탕으로 의원들의 이념 및 정책 성향을 분석해 발표한다. 의정 활동 모니터링의 핵심 자료인 셈이다. 국민의 적극적 감시는 의원의 무성의한 법안 표결 행태를 막는 첫번째 조건이다.
국회의 법안 ‘몰아치기’ 처리 방식도 의원들의 ‘묻지마’ 투표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지난 4월 한달간 열린 임시국회에서 본회의는 총 9차례 열렸다. 이 가운데 법안을 처리한 날은 단 4일이다. 추가경정예산안과 각종 기금 승인안 수십건을 제외하더라도 4일만에 법안만 164건이 처리됐다.
한번 열리면 2∼3 시간 진행되는 본회의에서 평균 40여건의 법안을 숙고하며 처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서강대 이현우 교수는 “짝수달만 임시국회가 열리더라도 회기 중에 휴회를 줄이고 본회의를 더 자주 연다면 한번에 처리하는 법안 수를 10여개로 줄일 수 있다”며 “제도보다는 운영 측면에서 의원들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국회의원의 입법 보좌인력 강화와 상임위원회 독립성 및 전문성 강화도 지적된다.
당론에 따라 투표를 하더라도 ‘하향식’이 아닌 ‘상향식’ 당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지금처럼 원내 지도부가 독점하는 의사구조를 민주화해야 ‘거수기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의원 총회 및 정책 토론을 통한 당내 의사 결정 시스템 활성화가 핵심이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특히 여당인 한나라당의 기능 실종을 우려했다. 강 교수는 “이명박 정부 아래서 여당의 조정 및 중재 기능이 작동하지 않으면서, 대통령이 마치 고지를 점령하라는 식으로 법안 처리를 명령하고 당이 이를 맡는 하급기관이 되어 버린 듯하다”고 비판했다. 강 교수는 “지금 이순간에도 미디어법과 관련해 한나라당에서 얼마나 토론되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토론없이 청부입법하면 6월 본회의에서도 똑같은 표결 행태가 재연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우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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