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권유 ‘권장도서’ 읽고 여중생 자살해 논란 가열

교사 권유 ‘권장도서’ 읽고 여중생 자살해 논란 가열

기사승인 2009-05-25 09:4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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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사회]
그냥 죽어 버리고 싶어, 속이 답답해, 모든 게 귀찮고 허무해····산다는 게 결국 어느 날 사라지기 위해서인데 그냥 지금 사라진들 뭐가 다르겠어····"(제목: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바람의 아이들 출판 119쪽)

국어교사가 권장한 소설책을 읽던 여중생이 한밤중 방문고리에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의 배경을 두고 첨예한 논란이 일고 있다.

광주 H여중 1학년 김수정(13·가명)양이 광주 농성동 S아파트 2동 406호 자신의 집에서 미처 꽃피지도 못한 생을 마감한 것은 21일 밤 11시30분쯤.

김 양은 이날 "수행평가를 위해 학교에서 선정한 권장도서의 독후감을 쓰고 자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가 1시간쯤 뒤 인기척이 없어 방문을 열어본 같은학교 3학년인 언니(15)에 의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당시 김 양은 체육복 허리끈으로 목을 맨 채 숨져 있었고 방 한켠의 책상위에는 자살 직전까지 읽던 '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이 한권 놓여 있었다.

조선대 ROTC출신으로 강원도 원주에서 올들어 전북 여산 모 군부대로 발령난 김모(40)소령의 1남3녀중 차녀인 김 양은 직후 119엠블런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안타깝게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아버지를 따라 자주 전학을 다녔던 김양은 광주로 이사온지 얼마안돼 이팔청춘의 짧은 생을 마친 것.

문제는 김 양이 다니던 학교측이 2009학년도 1학년 권장도서 목록 20권 가운데 1권으로 선정한 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라는 책의 일부 줄거리와 문장이다.

김 양이 숨지자 유족들은 "가치관 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은 어린 아이에게 죽음을 소재로 다룬 책을 강제로 읽게 한 국어교사와 학교 측을 납득하기 어렵다"며 "민감한 사춘기 소녀가 염세주의적 시각에서 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냐"고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동안 근무지를 수시로 옮기는 군인 아버지를 대신해 김 양을 보살폈던 외삼촌 나홍삼(33)씨는 "심성이 유난히 여렸던 조카는 1학년 국어교사가 이 책을 포함한 3권을 무조건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수행평가 숙제를 내주자 어머니에게 책 제목이 이상해서 읽기 싫다고 했었다"며 "독후감을 쓰지 않고 등교했다가 국어교사에게 벌을 받고 마지 못해 사고당일 밤 다시 책을 읽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조카는 할머니와 부모 등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받고 자랐을뿐 아니라 교우관계도 원만하고 지금까지 공부에 관한 스트레스도 전혀 주지 않아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다"며 "곳곳에 섬뜩한 문장이 튀어나오는 책을 읽다가 충동적으로 목을 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교장이나 교감, 해당교사에게 한번이라도 책을 꼼꼼히 읽어보고 권장도서로 선정했는지 묻고 싶다"며 "삶에 염증을 느끼게 하는 자극적 문장들로 가득찬 책이 비명에 간 조카에게 방아쇠를 당겼다"고 강조했다.

시체놀이를 하는 기분으로 이 세상을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94쪽)".

신이 있다면 내 손으로 그 신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난도질을 해주고 싶어.(중략) 죽여버리고 싶어, 그 날 그 길을 지나간 년놈들, 재준이를 보고도 그냥 피해 간 년놈들, 다 죽여 버리고 싶어, 다 죽여 버리고 싶어····(111쪽)

실제 이 소설은 자살이나 죽음을 미화하고 있지는 않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3개월 밖에 안된 소녀가 한번에 읽고 그 의미를 소화하기에는 전반적으로 난해한 문장들이 적잖이 섞여 있다.

이 책은 부모가 이혼한 뒤 흡연을 하는 등 탈선 여중생으로 전락하던 주인공 유미가 폭주족 흉내를 내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숨진 남자친구 재준의 갑작스런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일명 '성장소설'이다.

김 양과 같은 중학생으로 책에 등장하는 유미는 자신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건넸던 일기장에 재준이가 여자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오토바이를 몰다가 숨지기 전까지 썼던 일기를 읽게 된다.

유미는 다른 곳에서 전학을 온 뒤 왕따신세를 면지 못하다가 이성이 아닌 단짝친구로서 줄곧 재준이와 '건강한 대화'를 나누며 학교생활에 적응해간다.

그러다가 재준이 홀연히 세상을 등진 뒤 그의 어머니로부터 넘겨받은 일기장을 통해 지극히 평범한 인생의 가치와 가족의 소중함 등을 스스로 깨달아간다는 내용이다.

이 책은 한국출판인회의 선정 이달의 책, 책교실 추천도서, 모 광역단체 문화재단창작기금 수혜작, 어린이도서연구회 추천도서, 모 중앙지 선정 2004년 올해의 어린이 책, 모 시교육청 추천도서 등으로 책말미와 인터넷 등에 소개돼 있다.

김 양이 숨진 뒤 조문을 하러왔던 국어교사와 학교 측은 "내부결재를 거쳐 권장도서로 선정하는 과정에 불합리한 점은 없었다"며 "체벌 과정에도 큰 마찰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학교 측은 권장도서의 경우 교육과학기술부에서 먼저 지정한 도서목록 가운데 국어교사가 청소년단체 등의 추천여부를 참고해 선정하고 있다며 이번 주중 공식입장을 표명한다는 방침이다.

김 양이 재학하던 H여중은 앞서 지난달 유명인 자살로 청소년 모방자살(베르테르 효과)이 우려된다며 자살 전 증세와 대처법 등을 담은 안내문을 가정통신문까지 발송했다.

가정통신문은 자살에 관한 책을 읽거나 자살관련 사이트에 가입, 글을 쓸 경우 등을 자살을 예고하는 징후라고 소개했으나 정작 김 양의 자살을 막지는 못했다.

광주지역 교육단체 관계자는 "학교가 학생들에게 권유하는 책 중에는 선정적이거나 욕설이 난무하는 등 부적절한 권장도서가 더러 포함돼 있는게 엄연한 현실"이라며 "권장도서 목록을 더욱 신중히 작성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23일 광주 영락공원에서 화장된 김 양의 유해는 25일 유치원 졸업사진이 든 영정을 앞세운 학교 등의 노제를 지낸 뒤 한줌의 재로 뿌려졌다.광주=국민일보 쿠키뉴스 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
장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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