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15일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류모(47)씨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스며 있었다. 4년 전, 전북 완주군의 한 중학교에 다니던 맏아들 희준(18·가명)군이 선배로부터 폭행을 당해 정신병을 앓게 된 데 이어 지난 3일에는 둘째 아들 희상(14·가명)군까지도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됐기 때문이다.
류씨는 “희상이는 다리만 조금 다친 상태이지만 희준이처럼 정신도 이상해 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라며 전전긍긍했다. 형제가 학교폭력을 당한 이유는 모두 ‘선배들이 후배의 기강을 잡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희준이는 중2였던 2005년 ‘일진’ 선배로부터 폭행을 당한 뒤 지금껏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도 못한 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가끔씩 부모를 향해서도 주먹을 휘두르거나 욕을 할 정도다. 류씨는 “죽고 싶은 심정”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전주의 한 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희원(12·가명)양은 초등학교 5학년이던 지난해 따돌림을 당하던 같은 반 영희(12·가명)와 친하게 지내다가 똑같이 ‘왕따’가 됐다. 친구들은 영희를 집단 폭행하고, 심지어 손톱 밑을 뾰족한 연필로 피가 나도록 찌르는 ‘고문’을 가했다. 희원이도 1년 간 10차례 넘게 아이들에게 맞았다.
아버지 이용우(48)씨는 “가해 학생 부모 10여명을 만나 일일이 ‘재발방지 각서’를 받아내고서야 아이를 학교폭력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었지만 아직도 우리 ‘꼬마’가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며 탄식했다.
◇“지난해 청소년 10명 중 1명은 학교폭력 피해자”=이들 학부모가 털어놓은 학교폭력 사례는 학교가 더 이상 아이들을 위한 아늑한 ‘둥지’가 되지 못한다는 현실을 방증하다. 현재 학교폭력 때문에 신음하고 있을 청소년들의 수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청소년폭력예방재단(청예단)이 지난해 11∼12월 전국 초등학교 5학년∼고등학교 2학년 411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08년도 학교폭력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1년 간 1회 이상 학교폭력 피해를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한 응답은 10명 중 1명 꼴인 10.6%였다.
학교폭력의 가장 큰 특징은 피해자 상당수가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으며, 학교폭력을 목격한 동료 학생들 역시 그저 방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태조사에서도 ‘피해를 당하고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비율과 ‘학교폭력을 보고도 모른 체 했다’는 응답은 똑같이 53.1%로 집계됐다.
또 2006년부터 실시돼 온 청예단의 이같은 실태조사 자료 3년치를 분석해 보면 학교폭력은 점차 가해 학생이 집단화되고 있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2006년 2명 이상의 가해 학생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비율은 54.9%였으나 지난해에는 69.1%까지 치솟았다.
한편 본보와 인터뷰를 가진 학교폭력 피해 학생의 부모들 중에는 신체폭행보다는 교내에서의 집단 따돌림이 아이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줬다고 털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10대들 사이에서 따돌림은 ‘인격적 살인’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장기철(17·가명)군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철이는 고등학교 1학년이던 지난해 1년 동안 체육복을 6번이나 도난당하고 문제집도 수없이 잃어버렸다. 하지만 기철이의 부모는 아들이 ‘왕따’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머니 진모(46)씨는 “지난 2월 아들이 ‘학교에 가지 않겠다’며 아무리 깨워도 침대에서 억지로 눈을 뜨지 않았다”며 “이후 두 달 동안 학교를 아예 안 갔는데 아들을 끌어안고 울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그는 “여전히 기철이가 얼마나 심한 모욕을 당했는지 엄마인 나도 모른다”고 자책한 뒤 “세상이 내려앉은 것 같다”며 한탄했다. 기철이는 지난 4월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현재 인천에 있는 한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다.
◇“예방교육 활성화돼야”=전문가들이 학교 폭력 피해를 막기 위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부분은 예방교육의 중요성이다.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학생들에게 각인시켜주고 피해를 겪은 뒤 취해야 할 행동을 가르쳐주는 예방교육이 일선 학교에서 제대로 이뤄진다면 피해를 대폭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1년에 2차례씩 학생들을 상대로 외부 전문가를 초빙해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최근 2년 간 학부모들을 상대로 30차례가 넘게 관련 강좌를 열었던 서울 자양중이 좋은 예다. 지난해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소집 횟수가 16번에 달했던 이 학교는 올해 자치위를 2번만 소집했다. 자치위는 현행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 가해 학생을 선도하고 피해 학생 측과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각 학교가 의무적으로 소집해야 하는 조직이다. 소집 횟수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학교폭력이 감소했다는 뜻이다.
이 학교 김영윤 교장은 “예방교육을 통해 실제 학교폭력 피해의 심각성을 얘기해주면서 아이들에게 깨달음과 ‘감동’을 주려고 노력했던 것이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박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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