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21일 오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15층의 1인 병실. 국내 첫 존엄사 시행 환자인 김모(77) 할머니는 좁은 침대 위에서 고요하게 숨쉬고 있었다. 단정하게 흰 머리를 빗어 넘긴 김 할머니가 숨을 내쉴 때마다 입술이 가늘게 파르르 떨렸다. 나지막한 숨소리는 때때로 커지기도 했다.
할머니의 코에는 여전히 영양 공급을 위한 호스가 연결돼 있었다. 두 눈은 시신경 보호를 위해 붕대로 덮여 있었다. 한여름이지만 이불은 목까지 덮여 있었다. 할머니가 누워있는 21.4㎡(약 6.5평) 크기의 병실에도 어김없이 여름 햇살이 화사하게 내려앉았다.
23일이면 인공 호흡기를 뗀 지 한 달이 된다. 지난달 23일 병원 측은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중단하라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492일 동안 할머니를 지탱했던 인공 호흡기를 제거했다. 가족들은 “천국에서 행복하시라”며 임종 예배까지 드렸다.
여론의 관심은 할머니의 임종이 언제일까에 쏠렸다. 하지만 생명은 사람의 섣부른 판단에서 벗어나 있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가쁘지만 뜨거운 숨을 내쉬며 존엄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김 할머니 가족들은 지난 한 달을 ‘기적과 같은 시간’이라고 했다. 가족 대표인 맏사위 심치성(49)씨는 전화 통화에서 “남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기적의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일요일에는 다같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일주일 동안 저마다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 드려요. 육체적으로는 뇌가 죽었지만 영혼으로는 우리 이야기를 다 듣고 계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아무리 말을 건네고 어루만져도 김 할머니는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들은 호흡기를 뗀 얼굴이 “꼭 주무시는 것처럼 편안해 보인다”고 했다.
가족들은 호흡기를 제거한 뒤 2주 동안은 24시간 곁을 지키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난 9일에는 4분 정도 무호흡 상태가 이어져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다. 할머니가 점차 안정을 찾으면서 가족들은 하루 1∼2시간씩 교대로 병상을 지키고 있다.
김 할머니의 혈압, 산소포화도(혈액 속 산소 농도) 등 생체 수치는 안정적이다. 의료진이 염려했던 폐렴과 욕창, 심근경색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호흡기를 떼낼 당시 의료진은 “2주에서 한 달 정도가 안정화의 고비”라고 말했다.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거의 흘렀고, 장기 생존 가능성도 높아졌다.
김 할머니가 인공 호흡기를 뗀 뒤 우리 사회에서는 존엄사에 대한 논의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김 할머니는 지금도 여전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호흡하고 있다.
맏사위 심씨는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중단하라는 요구가 존엄사 논란으로 확대된 것을 불편해 했다. 심씨는 “가족들은 존엄사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 하나님이 주신 몸으로 호흡하고 그게 안되면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임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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