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국가인권위원회가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눈 앞에 둔 국제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 의장직을 스스로 포기했다. 다 차려진 밥상에서 밥도 못 먹냐는 비판이 나왔다. 인권 전문가들은 직접적으로는 내부조직조차 정비하지 못한 인권위의 조직 이기주의가, 궁극적으로는 현 정부의 인권위 축소 정책이 망신을 키웠다고 입을 모았다.
인권위의 ICC 의장직 포기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국내 인권현장을 살피고 여러 현안 해결에 더 힘을 쏟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는 것이다. 현병철 인권위원장도 "국제인권사회에서 모범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평가 속에 ICC의장기구 수임을 추진해 왔지만 현재는 국제기구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국내 인권 현장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인권위는 그동안 의욕적으로 ICC 의장 선출을 추진했다. 상징적인 이유도 중요했지만 조직을 지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인권위원장이 ICC 의장이 되면 실무적으로 도울 인원이 5∼6명 필요하다. 인권위 축소를 추진했던 정부에 들이댈 회심의 맞불 카드였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31일 "일이 조용히 진행됐다면 인권위는 어떻게든 의장직을 차지하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권위가 현위원장 대신 다른 후보를 고심한 것도 ICC 의장직이 그만큼 놓치기 싫은 자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2의 후보를 고르면 현 위원장의 자질 부족을 시인하는 게 돼 오도가도 못할 처지에 놓였다. 상임위원 중 1명이 나설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인권위는 제2 후보가 실패할 가능성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ICC 의장은 대개 각국 국가인권기구의 장이 맡는다. 현 의장인 제니퍼 린치는 캐나다 인권기구 대표다. 제2 후보를 냈을 때 다른 나라 인권 기구가 이를 용인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무리수를 둬 더 큰 망신을 당하기보다 깨끗이 의장직을 포기하는게 낫다는 것이다. 인권위의 한 관계자는 31일 "현 위원장이 ICC의장 후보로 나가도 문제 안나가도 문제였다"면서 "욕 먹을 각오를 하고 내린 결정이었다"고 인권위의 고충을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어떻게 해도 욕먹는 상황에서 덜 욕먹는 쪽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인권 전문가들은 인권위를 압박해 온 정부에 본질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인권위 독립성 수호를 위한 법학교수 모임'의 정태욱 인하대 교수는 "ICC는 각 나라 인권기구를 평가하는데 A등급이어야 정회원으로 의장직을 수행할 수 있다"며 "정부가 인권위를 무력화시켜 재심사 결과 B등급으로 떨어질 수 있는데 무슨 의장국이냐"고 말했다. 이창수 새사회연대 대표는 "지금의 우리나라 인권 상황이 세계 인권에 기여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평가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권기석 서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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