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1년] 고비 때마다 피말리던 순간들

[금융위기1년] 고비 때마다 피말리던 순간들

기사승인 2009-09-09 17:11:02
[쿠키 경제] 승부수를 던지다 리먼 사태로 서울 외환시장이 요동치던 2008년 9월 20일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뉴욕 연방준비은행(the New York Fed)이었다. 대화를 하자고 했다. 다음날 한국은행과 뉴욕연방준비은행, 미 재무부 실무자들이 마주 앉았다. 미 재무부 관계자는 “왜 미국 채권을 대량 매도하느냐”고 따졌다.

우리측 답은 “서울 외환시장에 달러를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서브프라임 사태로 금융시장이 급속히 불안해지자 달러 자산이 많은 국가들의 미 국채 매도를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

한은 실무자는 이를 놓치지 않고 역제안했다. 한국이 미국 채권 매도를 자제할테니 미국은 통화스와프 체결 대상국에 한국을 넣어달라고.
한국은 외환위기 당시 미국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금융시장을 과감히 개방했고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은 튼실한데 서브프라임 사태로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다는 점도 빠뜨리지 않았다.

미국측 관계자들은 경청했다. 확답은 없었다. 하지만 변화의 조짐이 감지됐다.

한은 뉴욕사무소가 분주하게 움직일 즈음 정부과천청사. 기획재정부 장관실을 나온 신제윤 차관보가 급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미스터 라우리! 나 짤리게 생겼어. 이번에 힘 좀 써 주소.” 상대는 클레이 라우리 미 재무부 차관보로 신 차관보와는 2007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때 알게 돼 친구가 된 사이였다.

미국이 전날 통화스와프 체결 대상국가를 영국, 일본 등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의 실낱같은 희망을 가진 건 이때부터였다. 당시 미국 정부 안에는 트리플A(AAA)’ 등급 국가와만 통화스와프를 맺는다는 원칙과 함께 다른 신흥시장국과의 형평성 문제, 한국은 통화안정 거점국가가 아닌 점 등 ‘3불가론’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강만수 재정부 장관은 ‘리버스 스필오버(reverse spill-over)’라는 대응논리를 만들어냈다. 신흥시장의 외화난을 방치하면 미 국채 매각을 부추겨 몸통인 미국 금융시장을 뒤흔들 수 있다는 논리였다. 강 장관은 이어 10월 20일 위싱턴에서 열린 G20(주요 20개국)긴급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장에서는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과 벤 버냉키 FRB 의장의 손을 붙잡고 “스와프가 필요하다(We need swap.)”라고 외쳤다.

순간 굳어진 분위기는 곁에 있던 신 차관보가 “아내를 바꾸는 스와핑은 아니다(Not wife swap.)”라는 농담을 건네면서 풀렸고, 우리 정부의 진정성을 전달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당시 외환딜러로 활약한 외환은행 김두현 차장은 “FRB에서 우리와 통화스와프를 체결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과감히 내리다 10월 27일 임시 금융통화위원회 전체회의가 소집된 한국은행 본관 15층 대회의실.

금통위원들의 얼굴엔 비장함이 흘렀다. 금융시장의 신용경색을 해소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금통위원들은 당시 기준금리를 5.0%에서 4.25%로 인하했다. 열흘 뒤 소집된 11월 7일 회의에서는 사상 최대인 1% 포인트나 내렸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정책금리를 내리는 와중에 한은이 지난해 8월 기준금리를 0.25% 포인트 올리자 말들이 많았죠. 그러나 당시엔 소비자물가가 5%대로 뛰고 유가도 배럴당 100달러로 오르는 등 물가안정이 흔들리는 징후도 강했다. 이후 리먼 사태를 계기로 물가보다는 금융시장 안정과 경기 회복이 급하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승일 전 한은 부총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다. 이 전 부총재는 특히 리먼 사태 이전 기준금리를 5.25%로 올려놓았기에 과감히 내릴 수 있었고, 외환보유액도 2600억달러까지 쌓아놓았기에 600억달러를 풀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앞당겨 크게 쓰다 해가 바뀌어 2009년 벽두가 되자 금융위기가 실물위기로 전이되고 있었다.

한국의 성장 엔진 수출이 추락하자 정부는 내수 진작용 추가경정예산 카드를 꺼냈다. 2월초까지만 해도 당국자들조차 추경예산 규모가 5조원을 넘지 않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정부는 3월 24일 28조9000억원 규모의 슈퍼추경안을 내놓았다. 당초 예상치의 6배 가까운 규모였다. 정부는 또 민간소비가 부진한 상황에서 올 예산을 상반기에 조기집행해 꺼져가는 경제의 불씨를 살렸다. 재정부 관계자는 “정책의 장·단점과 중장기 효과를 감안할 새도 없이 정말 동물적인 감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고 털어놨다. 김재중 정동권 기자
jjkim@kmib.co.kr
김재중 기자
jjkim@kmib.co.kr
김재중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