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상민 감독 “삶이란 결국 곤경임을 보여주는 삼류시인의 우악스러운 연애담”

소상민 감독 “삶이란 결국 곤경임을 보여주는 삼류시인의 우악스러운 연애담”

기사승인 2009-11-04 19:27:00

[쿠키 문화] 어떤 사람은 이 영화를 “결국 삶이란 곤경에 처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 근래에 보기 드문 코미디 영화의 수작”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주인공의 캐릭터가 너무 싫다. 이해할 수 없다”며 영화 전체를 깎아내린다.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하는 삼류 시인의 곤혹스러운 인생과 우악스러운 연애담을 그린 영화 ‘나는 곤경에 처했다’는 이렇듯 상반된 평가를 받지만, 그래도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 커런츠상을 거머쥐었다. 심사위원들은 “영화 속 캐릭터를 명확히 설정하고 스토리를 잘 통제하는 감독의 연출력에 높은 점수를 줬다”고 평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영화연구과정에 재학하며 이 작품을 만든 소상민(32) 감독을 최근 서울 홍익대 근처에서 만났다. 부산영화제 당시 감독의 생생한 캐릭터 창조력과 적절한 거리두기를 통해 능청스럽게 코미디를 만들어내는 솜씨에 감탄했던 터라 그의 앳된 모습은 적잖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영화에 자신의 모습, 자신이 학교를 다니던 세대의 모습이 투영돼있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대 종교학과 96학번으로 영화 동아리 ‘얄라셩’에서 활동했다.

-삼류 먹물의 인정 욕구, 좌충우돌 여자관계 등 인간의 한심한 속내가 여과 없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홍상수 감독 작품이 떠오르는데요.

“홍상수 감독 작품을 좋아해요. 영화를 만들면서 홍 감독의 특정한 영화를 떠올리진 않았지만, 삼류 먹물에 대한 영화를 하면 홍 감독에 대한 오마쥬라는 말을 피해갈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찌질한’ 캐릭터가 어찌나 생생한지, 보면서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모습들을 투영하기 쉬우니까 삼류 시인으로 설정한 건 맞아요. 약속 어기는 것도 많이 해봤고(웃음), 하지만 연애를 많이 해보거나 여자친구한테 무릎꿇고 빌어 보거나 하진 않았어요”

주인공 선우는 여자친구 유나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기로 해놓고 전날 밤 과음을 해 약속장소에 가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아프다는 핑계가 거짓말이었다는 것도 유나에게 들킨다. 결별을 통보받은
선우는 술에 취해 유나를 찾아가 “내가 백수라서 우습냐? 지구는 너희 같은 직장인이 지키는 게 아니야”라며 주정을 부린다. 주정으로 ‘진상’짓이 부족했던 선우는 술이 깨자 다시 찾아가 놀이터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시는 안 그럴게. 한 번만 용서해줘”라며 사정한다.

선우에게 반성이나 회개는 애초에 불가능한 단어다. 바르고 건강한 사회인 유나는 선우의 막장인생을 구원해 줄 유일한 빛이다. 그래서 선우는 유나를 더 포기할 수 없다. 충동적으로 사고를 치고, 곤경에 처하면 뻔뻔스러울 정도로 끊임없이 구원을 바라는 남자의, 또는 인간의 미욱한 본성은 선우를 통해 그대로 발현된다.

술에 취한 채 알몸으로 찜질방을 활보한 다음날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오늘은 이상하게 부끄럽네”라고 되뇌는 선우의 모습은 어쩌면 ‘삶’이란 곤경에 처해버린 우리 모두에게 감독이 보내는 위로인지도 모른다.

-선우 캐릭터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런 남자 너무 싫다’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영화다 보니 선택적으로 어떤 부분은 극단화시키기도 했어요. 하지만 분명 우리 세대의 모습 안에는 선우와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많은 분들이 꿈, 낭만 이런 걸 좇다가 취업에서 낙오자가 돼버린 선우에게 공감대를 느끼기도 하구요.”

-선우는 끊임없이 유나에게 돌아가고 싶어해요. 왜 그런 건가요?

“유나는 안정적이니까요. 불안정한 사람일수록 안정적인 사람에 대한 열망이 커지는 것 같아요. 선우라고 그렇게 사는게 안 피곤하겠어요?”

-배우캐스팅은 어떻게 했나요?

“선우 역의 민성욱씨는 원래 연극 배우 출신인데 오디션 때 느낌이 너무 좋아 바로 정했어요. 유나 역의 정지연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연출을 전공한 친구인데, 다른 영화에 출연했을 때 이미지가 마음에 들어 결정했어요.”

-장편연구과정인데, 학교 측 도움은 많이 받았나요?

“그럼요. 기자재를 다 학교 장비로 했고, 제 담당은 ‘청풍명월’을 감독한 김의석 선생님이셨는데, 선생님이 많이 개입은 안 하셨지만, 그래도 큰 틀에서 작품이 방향을 잃지 않게 도와주셨어요.”

-상 타니 주변 반응은 어떻든가요?

“많이들 축하해주시고, 중심 잃지 말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부모님께서도 ‘뭐하고 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시다 상을 타니 안심하시는 것 같구요.”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나요?

“고등학교 2학년 때요. 기숙학교였는데 친구들은 나가서 당구치거나 할 때 전 비디오방 가서 영화봤어요. 그 때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 영화들을 좋아했고, ‘나도 영화를 할 수 있겠구나’싶었던 건 에릭 로메르 감독 영화를 보면서부터였어요. 감정을 놓치지 않고 전달하는 ‘녹색광선’ 같은 영화요.”

-대학 때도 영화를 하지 않았나요?

“영화동아리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시만 해도 운동권 분위기가 주류여서 저 같은 스타일은 영화를 만들기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영화아카데미 시험을 봤죠. 3번 시험을 쳐서 마지막에 ‘쾌락원칙을 넘어서’라는 작품으로 붙었어요. 계속 떨어지니까 다른 일 할까도 생각했어요.”

-부산영화제 수상 소감이 “못난 감독, 못된 감독을 믿고 따라줘 고맙다”였어요. 못된 사람인가요?

“제가 능력이 있으면 스태프가 덜 고생했겠죠. 게다가 제가 욕심이 많아서 배우들도 고생을 많이 했어요.”

-차기작 계획은요?

“90년대 중반에 관심이 많아요. 그 때를 잘 살펴보면 지금과 비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금은 막연한 거지만요.”

첫 인상은 그저 귀공자 스타일의 동안 청년이었다. 어라, 근데 눈꼬리가 살짝 처져 사람이 좋은 듯 보이면서도 눈빛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본인에 따르면 자신이 사람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일단 벽을 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은 이 청년 감독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이 이 역량있는 감독의 매서운 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까. 국민일보 쿠키뉴스 양지선 기자
dybsun@kmib.co.kr
양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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