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연예] 서울 방이동 올림픽홀에서는 지난 22일 떠들썩한 축제가 열렸다. 패티김부터 투애니원까지, 세대를 초월한 가수들이 총출동했다. 올림픽홀이 국내 최초 대중음악 전문 공연장으로 거듭난 것을 자축하기 위해서였다. 마이크를 잡은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공연장이 생겨서) 원로 가수 분들이 긴장하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는 걸 보니 우리가 (그동안) 못할 짓을 했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개관공연이 끝나자 온라인상에서는 한 뮤지션의 한숨 섞인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됐다. 우리나라 최고의 기타 세션 함춘호(50)의 한탄이었다. 그는 트위터에 “너무 맘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다. 가창자 만이 대중음악가인가”라고 이렇게 적었다.
“오늘 현장에선 한류의 주역들이 당당하게 연주자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반주 테이프 또는 노래가 다 있는 음원을 틀고 말았습니다…오늘 또 하나 비싼 무대가 생겼습니다.”
지난 26일 올림픽홀에서 함춘호를 만났다.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74)의 50년 음악인생을 기리는 헌정공연을 앞둔 시간이었다.
함춘호는 “연주자는 철저히 배제하고 가수만 부각되는 공연을 보는 것이 너무 속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작심한 듯 정부에 섭섭했던 감정을 쏟아냈다.
-트위터에 올린 글이 화제가 됐습니다.
“제가 2009년부터 국내 연주자 중심으로 뮤지션 400여명이 모인 ‘한국소리모음회’ 회장을 맡고 있는 만큼 이럴 때 목소리를 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정부 대중음악 정책이 연주자를 뺀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연주자는 그냥 악단, 소품에 불과하더라고요.”
-그래도 대중음악 전문 공연장이 생긴 건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가요.
“올림픽홀 대관료가 하루에 2000만원이 넘어요. 전날 와서 무대 세팅하려면 돈을 더 내야 해요. 이런 공연장에서는 흥행성 갖춘 가수만 무대에 설 수 있을 뿐 연주자는 공연 열기가 힘들어요. 공연장 시설만 놓고 봐도 문제가 있어요. 의자 좀 바꾸고 내부 디자인 약간 바꾼 걸 가지고 ‘대중음악 전문 공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올림픽홀 1층에 설치된) 우리나라 대중음악사 정리한 대중음악전시관 역시 철저히 가수 중심으로만 만들어놨어요.”
1981년 이광조의 ‘저 하늘의 구름 따라’ 음반에 참여하며 기타리스트로 첫 발을 내딛은 함춘호는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90년대엔 ‘함춘호가 외국 나가면 음반 제작이 마비된다’는 말이 돌았을 만큼 그의 명성은 대단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함춘호는 지난 3일 방송된 KBS 음악프로그램 ‘유희열의 스케치북’(‘스케치북’)에서 울음을 억지로 참는 모습을 보였다. 스케치북이 100회를 맞아 ‘더 뮤지션(The Musician)’이라는 타이틀로 마련된 공연으로, 국내 최고 연주자들이 무대에 섰던 날이었다. 함춘호를 비롯해 베이시스트 신현권, 드러머 배수연, 색소폰 김원용, 건반 김효국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연주를 하던 이들이 이날만큼은 무대 앞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더 뮤지션’ 특집에서 감회가 남다른 것 같았는데.
“유희열씨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한테 감사해서 가슴이 벅찼어요. (조명이 비추는) 무대 앞과 밴드가 있는 무대 뒤는 겨우 한 발짝인데, 그 한 발짝 앞으로 나가는 것이 이렇게 힘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같이 공연한 후배들도 정말 멋있었고, 노래를 불러주러 온 가수들한테도 고마웠어요. 소감을 묻는데 가슴이 벅차서….”
-방송 후 반응은 어떻던가요.
“주변에 알고 지내던 연주자 중에 울면서 전화한 사람도 있었어요. 한 대학 실용음악과에 다니는 학생은 ‘외국 공연 보는 것 같았다’며 흥분하더라고요. ‘더 뮤지션’ 같은 공연만 방송에서 몇 번 만들어줘도 연주자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해요. 예컨대 올해 초 MBC ‘세시봉 콘서트’에서 송창식 선배와 제가 통기타 치는 모습 보여준 후에 기타 판매량이 달라졌잖아요.”
현재까지 함춘호의 기타 소리가 들어간 가요 음반만 모으면 수천 장이 넘는다. 라디오를 들으면 2시간 내내 자신이 참여한 곡들만 방송될 때도 있다고 했다. 30년 동안 누구보다 지근거리에서 대중음악의 변화상을 지켜봐온 셈이다.
-함께 작업한 가수 중 가장 인상적인 보컬리스트는 누구였나요.
“일단 송창식 선배가 기억에 남아요. 기타 치는 것도 다르고 노래도 남달랐어요. ‘이 사람은 삶을 노래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기타를 치면 딱 맞춰주세요. 미친 듯이 기타를 치면 미친 듯이 노래해주고, 사뿐사뿐 걸어가는 느낌으로 연주하면 노래도 그렇게 해주시는 분이에요. 최백호 선배도 마찬가지로 송창식 선배랑 비슷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에겐 전인권 선배를 빼놓을 수가 없어요. 음악에 눈을 뜨게 만들어주신 분이거든요.”
-K팝이 외국에서 인기가 많은데.
“다양한 문화가 공생을, 상생을 해야 하는데 좀 안타까운 부분이 많아요. 아이돌 그룹 기획사는 외국 공연을 할 때도 좀 더 신경 써야 돼요. 예를 들어 SM엔터테인먼트가 지난해 LA에서 열었던 콘서트만 봐도 그래요. 비행기에 가수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이런 사람 밖에 없었을 거예요. 공연 사진을 봐도 무대에 악기가 없어요. 예를 들어 마돈나가 내한공연을 하는데 그렇게 MR(반주음악) 틀고 무대에 선다고 해봐요. 관객들 난동 피울 겁니다.”
데뷔 30주년을 맞았지만 그는 지금껏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은 CCM 음반을 빼면 이렇다할 연주 음반을 냈던 적이 없다. 그는 ‘뮤지션 함춘호’로서 품고 있는 꿈을 묻는 질문에 “연주 앨범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예전엔 환갑까지만 녹음실에서 연주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꿈이었는데 지금은 내 이름을 건 음반을 만들고 싶어요. 나의 이야기가 담긴 앨범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꿈틀대고 있거든요.” 국민일보 쿠키뉴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